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사 65:17-25)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1. 22. 06:52

창조절 11주 (추수감사절), 2025년 11월 16

 

 

새 하늘과 새 땅

 

지난 2년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참상에서 보듯이 전쟁은, 특히 군사력이 한쪽으로 크게 쏠린 가운데서 벌어지는 전쟁은 약소국 사람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무너진 기원전 721년 대참사와 기원전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남유대가 무너진 대참사를 직간접으로 경험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세월이 약간 흘러 바벨론 유수 이후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선포된 신탁입니다. 내용은 환상적이면서 은혜롭게 들리나 그 밑바탕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영적 고뇌가 숨어 있습니다. 그는 당시 민중들에게서 이런 한탄을 들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패망을 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거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기력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한탄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대 백성이 이런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욥기> 이야기도 근본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다룹니다. 오늘날 우리도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 우리 인생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사랑이 충만하신 분인데,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은 왜 평화롭지 못할까요? 왜 이렇게 폭력적이고 불의할까요? 힘센 이들만 큰소리치고, 약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반복해서 고난을 겪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이사야 선지자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조심스럽게 전할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65:17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는 이사야 선지자는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적 망상가가 아닙니다. 그는 제국 앞에서 작은 나라가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유대도 제국처럼 강력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기존의 제국보다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제국 말입니다. 오늘 대한민국도 그런 열망의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불의한 제국을 무너뜨린 새로운 제국은 다시 불의한 제국의 전철을 거의 그대로 밟습니다. 이런 정치 경제 논리로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이런 세상이 올까요?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놀라운 사실을 언급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담했던 이전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 세상이 바로 그가 말하는, 그가 꿈꾸는, 그가 희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전의 아픔을 자꾸 기억하여 마음에 새기라고 가르칩니다. 국경일 제정의 본질도 기억입니다. 기억해야만 나쁜 일을 반복해서 당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8.15 광복절을 기억해야만 우리나라가 다시 식민 지배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 치료도 이전 기억을 숨기지 말고 노출해서 치료받게 합니다. 그런 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일시적입니다. 아픈 상처에 진통 소염제를 바르는 정도입니다. 아주 시급한 상황에서는 그런 대증 요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것이 아예 기억되지 않고 생각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한 완전한 치유입니다.

 

바벨론 제국으로 인해서 겪었던 이전 일들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려면 그런 참혹했던 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을 알고 경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애지중지하던 보석 목걸이를 소매치기당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상실감으로 병을 얻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소매치기당한 목걸이가 하찮게 보일 정도도 멋지고 귀한 목걸이를 다른 이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영혼의 참된 보물이 바로 하나님의 손길과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기억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

 

이사야는 19-23절에서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건강한 출산, , 농사 등등이 어려움 없이 진행됩니다. 그 누구도 개인 재산을 억울하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평화로운 일상의 완벽한 회복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말입니다. 21절과 23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우리가 다 경험하듯이 이런 완벽히 평화로운 일상은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일상은 둘째 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게 반드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마치 토끼몰이하듯이 이 세상이 말하는 어떤 목표 지점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평화로운 일상을 살겠습니까. 너무 가난해도 일상이 유지되기 어려우나, 거꾸로 너무 돈이 많아도 일상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대도시에서 화려하고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오지에서 순전히 일용할 양식에만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일상이 더 평화로울지 모릅니다. 일상의 평화는 그야말로 천지개벽과 같은 일입니다. 따라서 일상의 완전한 평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가능하다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옳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요?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평화는 물론 우리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의 평화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내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우리에게 그런 삶의 가능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외워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25절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이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다거나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거침없이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믿었고, 희망했으며, 그렇게 상상한 겁니다. 기원전 8세기 초에 살았던 제1 이사야는 사 11:6-8절에서 같은 주제를, 위에서 인용한 사 65:25절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11장의 내용이 원 텍스트로 보입니다. 65장은 그 원 텍스트를 줄여서 인용했을 것입니다. 패전과 포로 생활과 민족 공동체의 불안정 등등으로 고민이 깊었던 선지자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어떤 세계를 향해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 이야기처럼 거룩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친 겁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절망하는 민중을 향한 선의의 사탕발림에 불과할까요? 선지자들의 이런 거룩한 상상력은 종교적 망상일까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허구의 철학>(Fiktionen)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자연 세계만이 실재(reality)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통 허구라고 부르는 것들도 고유한 실재라는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는 수학 계산이나 물리적 현상이 아니나 우리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실재인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빵이나 책상처럼 사물을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게는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말하기 때문에 성경의 세계는 허구로서의 실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상상력은 개인의 종교적 망상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종교적 망상은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사이비 교주들의 특징입니다. 이사야는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이라는 전통에 분명하게 서서,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미래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상상력은 믿음과 희망이며,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이런 메시지를 현실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전자에 속합니다.

 

이사야가 꿈꾸는 평화로운 일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갖춰진 사람들에게 가능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다는 상상력을 현실로 느끼는 안목 말입니다. 당시에 이리는 난폭했던 제국입니다. 어린 양은 유대입니다. 둘 사이는 도저히 좁혀질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을 봅니다. 어떤 이들에게 북한은 이리입니다. 그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니까 서로를 배척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기에, 말하자면 거룩한 상상력이 고갈된 세상에서 살기에 오늘날 물질적인 풍요 가운데서도 사람들의 관계는 피폐해졌습니다. 금수저, 은수저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지옥 같은 삶으로 뛰어드는지 모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면 안 되나요? 그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연주의 영성 넘어

 

올해는 국내외적으로 자연재해가 유독 많아서 기후 위기를 현실로 실감하는 한해였는데도 지구에는 여전히 많은 먹을거리가 생산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기뻐하는 절기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자체가 기적입니다. 저는 요즘 테니스장에서 중간 쉬는 시간에 티백 둥굴레차를 마십니다. 따끈한 찻물이 입안을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아찔할 정도로 감미롭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몸 세포 구석구석으로 퍼집니다. 지구에 여전히 물이 있다는 사실, 어떤 농부가 둥굴레를 키워서 차로 만들어냈다는 사실, 그 이전에 햇살과 비와 탄소가 식물을 키워냈다는 사실이 모두 지구에서만 벌어지는 거룩한 현상입니다. 우리집 텃밭에서 자라는 무와 배추와 쪽파와 시금치와 봄동 배추도 지구와 태양,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힘을 받아 자란 게 분명합니다. 언젠가 지구에서 이런 먹을거리가 생산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아니 오직 그분의 은혜로 그런 순간이 오기 전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인생살이에서 불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어느 정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자연주의 영성을 확보할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상을 삽니다. 지속 가능한 생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나름 투쟁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칼 라너(K. Rahner)가 표현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런 분들과 함께 자연주의 영성 안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적 통찰력을 붙들고 삽니다. 먼저 자연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산과 강과 들과 숲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들판과 숲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나, 거기서도 끔찍한 온갖 경쟁과 살육이 벌어집니다. 자기 새끼를 먹이려고 순록 새끼의 목을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사자의 행위를 보십시오. 사마귀는 짝짓기 뒤에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모든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병들고 늙어 죽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 현상이 지구에서 이어집니다. 왜 그런지를 우리는 그 현상만 알지 근본 이유는 모릅니다. 여전히 세상과 자연과 생명 현상이 비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세상과 자연과 그 안에 있는 생명체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지만, 그 창조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지금도 창조 중입니다. 마지막 때 창조가 완성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게 될 것입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릴 것입니다.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라고 감동적으로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이 가르침을 믿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자기의 인생살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하는 질문이 마지막으로 가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거룩한 상상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는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즉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손길과 능력을 향해,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유일한 근거이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