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구원 지향적 삶 (욜 2:23-32)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0. 27. 06:21

 창조절 8(종교개혁508주년), 2025년 10월 26

 

 

여호와의 날

 

요엘이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났습니다.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농사를 완전히 망친 겁니다. 그 상황을 욜 1:4절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자연재해로 인해서 농사를 망치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고, 인심이 사나워집니다. 1:20절에는 이런 표현도 나옵니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들짐승도 버텨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2:4절 이하에서 메뚜기떼를 막강한 제국 군대의 공격처럼 묘사합니다. 몸은 말 같고, 그 달리는 행태는 기병 같으며, 그들이 몰려다니는 소리는 병거가 떼로 달려가는 소리 같고, 산불이 쏟아내는 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6절은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다.’ 하고, 10절은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고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도저히 피할 수도 없고, 막아낼 수도 없는 엄청난 자연재해에 관한 사실적인 보도입니다.

 

이런 사태 앞에서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2:12절은 이렇습니다.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는 말로 들립니다. 끔찍한 자연재해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라니요, 애통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니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대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나라의 곡간을 열어서 비축미를 백성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곡식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기아 문제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지혜를 모아서 추진해야겠지요. 아마 당시에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정치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선지자 요엘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사태에 접근합니다. 대재난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입니다. 메뚜기떼라는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대재난이 찾아올 겁니다. 지진과 화산폭발과 해일이 일어나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찾아옵니다. 모든 대재난을 사람의 힘으로 일일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요엘이 볼 때 곡식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2:13) 외쳤습니다.

 

요엘의 선포는 정말 옳은가요? 메뚜기떼 출몰과 같은 대재난은 고대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되나요? 대재난은 실제로 하나님의 내리시는 심판일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재난이 일어나면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선한 사람도 희생당합니다. 어린아이들도 희생당합니다. 세상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대재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다는 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됩니다. 동남아 어느 지역이 태풍과 쓰나미 등으로 대재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망언을 설교한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요엘은 무슨 이유로 메뚜기떼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메뚜기떼 재앙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고이자 상징입니다. 요엘은 2:1절에서,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듯이,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이 욜 2장에서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날과 달리 메뚜기떼 재앙은 결국 지나갈 겁니다. 그래서 요엘은 2:21절에서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위로했습니다. 22절에서는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들짐승에게 임한 대재난이 지나가고 일상이 안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이런 대재난이 지나가는 거와 차원이 다릅니다. 여호와의 날에 관해서 본문은 당시 사람들을 거의 공포에 몰아넣을 만한 우주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2:31절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과 같이 변하는 건 개기 일식과 개기 월식 현상을 가리키겠지요. 고대인에게 이런 우주 현상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으로 다가왔을지 상상이 갑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우주 현상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어서 고대인들처럼 공포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에서는 그들이나 우리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주는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그 작용이 신묘막측합니다. 태양은 지구에서 1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도 8 20초가 걸립니다. 크기는 지구의 130만 배입니다. 지구와 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달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서 지구를 돈다는 사실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우주 먼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 긴 과정에서 찰나 같은 한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우주의 거대함과 신비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곤 합니다.

 

여호와의 영

 

여호와의 날에는 메뚜기떼와 개기 일식과 개기 월식 등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각종 대재난이 우리가 죽을병에 걸린 것이라면 여호와의 날은 실제로 죽는 겁니다. 죽을병은 나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치병과 대재난에서도 살아났습니다. 죽을병이 어떤 건지는 어느 정도 알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실제 죽음은 크고 두려울 뿐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날을 맨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로운 영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여호와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여호와의 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에 관한 28, 29절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그 후에 내가 내 영(My spirit)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dreams)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visions)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여호와의 영이라는 단어가 어떤 분들에게는 멀리 느껴질 겁니다. 시인과 예술가들은 그게 어떤 현상인지를 느낍니다.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상에 대한 경험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평소에 무심하게 보던 꽃이나 풀이 어느 순간에 빛처럼 경험될 때가 있습니다. 구름이나 바람이, 심지어 가로수의 그림자가 그렇게 경험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미학적 정신이 살아날 수 있게 하는 예술혼이 그에게 임한 겁니다. 요엘은 지금 여호와의 영이 우리에게 장래 일을 말하게 하고, 꿈을 꾸게 하고, 이상을 보게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치고 선포했습니다.

 

위 구절은 사도행전 2:16절 이하에서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되었습니다. 그 대목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뒤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선포한 설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 제자들이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한다고 오해했습니다. 베드로는 낮술에 취한 게 아니라 성령에 감동받은 것이라고 변호하는 과정에서 요엘 선지자의 본문을 인용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요엘이 가리키는 여호와의 영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했다고 믿었습니다. 영의 임하심에 관한 요엘 선지자의 거룩한 신탁이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은 이유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참된 의미에서 미래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 전승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말하고, 즉 미래에 관심이 있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고 있으신가요? 아직은 그게 손에 잡히지 않나요?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를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세상 지식이 별로 없었던 고대인들의 유치한 생각에 불과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은 유치하고 우리는 지혜로울까요? 혹시 거꾸로 된 건 아닐까요? 요엘 선지자의 선포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현대인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것과는 반대로 사는 데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협소하게 경험하는 겁니다. 장래 일을 말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것만 말합니다. 꿈을 꾸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합니다. 참된 이상을 보지 못하고 이해타산과 각자도생이라는 망상만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교회라는 이상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공교회라는 전통은 교회의 사적 차원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 지역을 하나의 교구로 보고, 교구 전체를 하나의 교회로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는 철저하게 사적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게 왜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게 더 심각한 겁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미래를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의 영으로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본다는 말은 자기의 삶을 여호와와 밀착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구원 지향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이를 요엘은 32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바로 예언하는 자이고, 꿈을 꾸는 자이며, 이상을 보는 자입니다. 그들은 구원 지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우리는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벌어질 일을 우리가 대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이들이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을 자기들의 종교 영역 안에 가두고 자신들이 구원을 독차지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구원받으려면 통일교회나 신천지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리키는 종말은 열려 있습니다.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그제야 그게 어떤 현상인지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 자궁 밖의 세계를 출생 이후에나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기다림을 가리켜서 요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즉 구원 지향적으로 살아간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아이와 함께 나들이 나갔다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엄마들은 절규하듯이 아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를 찾겠지요. 지난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집을 잃은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거기에 자기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외에는 생명을 얻을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42:1, 2절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기자의 이런 심정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대체할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쫓기듯 급한 일도 많고, 해결해야 할 어려운 일도 많고, 미친 듯이 따라가고 싶은 즐거운 일도 많습니다. 대중 매체는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듭니다. 이제는 넷플릭스나 SNS나 자극적인 유튜브 방송과 각종 인터넷 플랫폼이 사람들을 마치 약장사처럼 끌어모읍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설명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GAFA(Google, Amazon, Facebook, Apple)는 이미지 장사로 떼돈을 법니다. 대중들은 거기에 열광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려야 느낄 여유가 없으니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생각이 들겠습니까. 어떻게 구원 지향적 삶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508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루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법학도로 살다가 22세인 1505년에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27세가 된 1510년도에 로마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수도사 전통에 따라서 Scala Sancta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행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층계를 오르던 어느 순간에 이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교로 돌아가서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1513-1516년경에 롬 1:17절에서 대답을 얻었습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후로 그는 영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1517년 로마가톨릭 교회 교황청을 비판하는 논제를 95개 조항으로 만들어서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 위에 게재했습니다. 1517 1031일입니다. 개신교회는 그날을 종교개혁일로 지켰습니다.

 

저는 루터가 지금 종교개혁자로 이름을 날릴 뿐만 아니라 유럽 정신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그가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구원 지향적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혼의 자유와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를 그가 평생에 걸쳐 손에서 놓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표현처럼 구원을 얻으려고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짖듯이 살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여전히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있을까요? 성육신 되신 예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를 믿음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크고 두려운 날인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도 이미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