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6주, 2025년 10월 512일
복음의 정체
바울과 디모데는 사제지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집안 사정도 훤히 꿰뚫고 있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친분이 깊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디모데가 동행한 적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개척한 교회에 디모데를 파송하고, 목회에 관한 조언을 종종 전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목회 서신으로 분류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딤후 2:8절을 들어보십시오.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여기에 드러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όν)의 번역입니다. 영어로는 보통 gospel이나 good news라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소식과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대박’이 나는 겁니다. 슬롯머신에서 잭팟(Jackpot)이 터져서 벼락부자가 되는 거와 비슷한 일들이 현대인에게는 복음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많은 사람이 석유나 금광을 발견하려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요즘은 아파트나 주식이나 비트코인을 그런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쏠쏠한 재미도 복음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그런 복음을 듣기 위해서 눈과 귀를 기울이면서 삽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바울의 말이 설득력과 현실성이 있을까요? 그가 말하는 복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면 세상의 통속적인 원리와 다른 차원의 삶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폭력의 질서로 세상을 보는 조폭들과 국제환경 보호단체인 그린피스의 세계관은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세계에서는 사람의 성과와 업적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의 세계가 공중 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구체적인 이 세상의 삶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삽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면서 삽니다. 하루 세 끼 똑같이 먹고 사는 것 같으나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삶의 초점을 맞춥니다.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습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이 아침에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그걸 준비했고, 그걸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사는 것만을 생각하나, 다른 한 사람은 빵과 커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빠져듭니다. 이게 비슷한 거 같아도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도 결국에는 은혜 아니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눅 14:15절 이하에 나옵니다. 모두 그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막상 잔치 날이 되자 각자가 핑계를 대고 거부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에 나가봐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소를 샀기에 시험해 봐야겠다 하고, 셋째 사람은 결혼해서 바쁘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일이 다 바쁜 일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통속적인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살면 좋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밭도 사고, 소도 사고,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십시오. 문제는 거기에 매몰되어서 결국에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아무나 이해하거나 느끼거나 경험하거나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기가 힘든 겁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코웃음치거나 멀뚱하게 쳐다볼 겁니다. 도대체 죽었다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말입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아는 세계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원리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세계관에 떨어져 있는 겁니다. 이 세계를 자연과학의 범주에 가둔 채 자신들이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설명할 수 있다고 으스댑니다.
저는 자연과학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에 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자연과학이 담아낼 수 없는 깊이와 넓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이를 의미장(Sinnfeld)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의미장 개념에 따르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진술이 자연과학의 검증을 통해서만 그 실재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설명은 이미 판넨베르크나 몰트만이나 한스 큉 같은 신학자들도 오래전부터 주장했습니다. 더 근본에서는 성경이 그것을 말합니다. 시와 음악을 물리학자와 생물학자와 화학자가 판단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주장이나 다 옳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났다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신학의 의미장 안에서 정당하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힐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죽은 자>는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죽을 자이고, 그게 분명하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세계 최고 미녀, 잘 나가는 CEO, 노벨 수상자들, 교황과 미국 대통령 등등, 모두 죽은 자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의 세력에 포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한편으로는 태연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급하거나 난폭하게 살지만 모두 <죽은 자>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세력에게 굴복당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찬송가를(160장) 불렀습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둘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고전 15: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마술적인 것쯤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이 상여에 실려서 무덤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나서 다시 살아났다거나 마리아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 걸어 나왔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여기면 예수의 부활을 크게 오해하는 겁니다. 압축적으로 말해서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마 22:23-33절에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벌인 부활 논쟁이 나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삐딱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 남자가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아기 없이 죽었습니다. 동생이 이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이런 제도가 고대 유대 사회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부활이 일어날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고 물은 겁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 가거나 시집가는 게 아니라 하늘의 천사와 같게 된다고 말씀하신 뒤에 32절에서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죽음마저도 우리를 하나님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게 곧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조금 신학적인 방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미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 분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평생에 걸쳐서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빌 3:11)을 추구했습니다. 오늘 본문 딤후 2:11절에서도 이렇게 외칩니다.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외침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죽었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뜻이고, 살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도 했습니다. 이전에 자랑으로 여기던 것들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것들의 결과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정치권력과 유대의 종교 권력이 결국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던 유랑 랍비인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유대교와 로마 제국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의 절대화가 문제입니다. 종교 제국주의와 정치 제국주의 말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세계의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욕망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제국주의의 본질입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예수와 함께 살지 못합니다.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와 함께함으로써 주어지는 영혼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만으로, 결정적으로는 예수의 구원 사건만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됩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험에 합격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면 좋겠지요. 그 사람의 운명이 행정고시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공군 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쳤습니다. 학과 시험, 체력 시험, 신원 조회 등등을 거쳤는데, 결국에는 떨어졌습니다. 서울 교대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떨어졌습니다. 두 학교 모두 등록금이 없어서 가난한 저의 집안 형편에서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교회 장학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사관학교나 교대에 합격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요. 그때의 불합격이 저에게 오히려 유익한 게 아닐까, 하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은 우리에게 약간의 도움이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데에 있습니다. 가정주부로 살아도 좋고, 공장 노동자로 살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깊어진다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병약하면 병약한 대로 모든 순간이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사건으로 경험되니까요. 이게 바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왕 노릇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12절에서 멋진 은유로 표현했습니다. ‘왕 노릇’이라고 말입니다. 왕은 다른 이들의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자기가 명령을 내립니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가 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왕처럼 삽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왕처럼 사는 삶이 여기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여러 가지 일로 시달립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왕처럼 품위를 지키면서 사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억지로 노력하고 집중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알면 그렇게 살게 됩니다. 복음은 곧 10절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고 영원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왕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왕 노릇은 실제 삶과는 관계없는 종교적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요? 실제로 무엇이 왕으로서의 특성인지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오늘 바울이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전한 내용을 근거로 본다면 말다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산다고, 아주 엄중한 내용을 말하다가 갑자기 도덕적인 훈계처럼 들리는 말다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게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당시 말다툼은 영지주의자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소동입니다.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교회 밖으로 내보냈으나 이들은 교회에 여전히 남아서 계속해서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본래 이단의 성격이 끝만 다른 겁니다. 바울은 이들과의 말다툼을 경계했습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진리를 그대로 방치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논쟁할 때는 논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당시 유대교 고위층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겠으나 그것이 말다툼으로 변질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다툼이 아무 유익이 없는 바울의 말은 그 말다툼으로 우리의 영혼이 손상당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부부 사이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겁니다. ‘말싸움’에서 이겨봤자 마음이 별로 편치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상해가면서까지 그들과 말다툼을 벌이지 않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영혼이 풍요로운 게 훨씬 바람직한 삶이니까요. 이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른은 아이들의 말다툼에 끼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어른입니다. 바울이 12절에서 언급한 ‘왕 노릇’이 이를 가리킵니다.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가 왕입니다. 왕의 존엄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면서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서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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