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절 4주, 2025년 9월 28일
‘2차 민생 회복 소비 쿠폰’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했던 1차 때와 달리 상위 10% 부자들은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제미나이에 물어봤더니 상위 10% 부자의 재산 액수는 2023년 기준으로 대략 10억 원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대도시와 수도권에 거주합니다. 생각보다 액수가 크지는 않습니다. 서울에서 웬만한 아파트는 10억 원을 넘을 테고, 좋은 위치 아파트는 20억 원을 넘기도 할 테니까요. 저런 통계가 부동산은 제외하고 금융 자산만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자들이 밀집해 있는 강남 지역에 대형 교회당이 많고 거기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퍼센티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회의원 중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퍼센티지도 평균의 두 배가량인 29%라고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부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6:19-31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씀입니다. 눅 16:14절은 바리새인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요즘도 노골적으로 “나는 돈이 좋아.”라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보다는 오히려 사두개인들이 부자였으나 지금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던 바리새인들은 부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9절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멋진 인생입니다. 세계 일류 패션 디자이너가 만든 옷과 명품 핸드백 등을 걸치고 유명 셰프가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식사 자리를 방문하며, 고급 요트 여행도 다니고, 고액 그림을 집 안에 걸어두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부자로 보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렇게 한번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문제는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끝나면 모를까, 일반적으로는 끝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 꼭대기까지 자신들의 능력으로 탑을 쌓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욕망을 제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자, 즉 그들이 작당할 수 없게 되자 그제야 바벨탑 도시 만들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게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본문은 부자와 대척점에 있는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의 이름인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의 히브리어 엘레아자르의 그리스어 표기입니다. 그는 거지였습니다. 몸도 성치 않습니다. 악성 피부병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그는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거적때기를 깔고 지내면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허기를 면했다고 합니다. 부자 가족이나 손님이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빵부스러기입니다. 개들은 그에게 와서 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더는 내려가려야 내려갈 데가 없는 나락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대도시 노숙자들의 형편보다 더 어렵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인생살이에서 의지할 곳이 전혀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그런 가난한 자의 신앙을 높이 평가합니다. 유대교 전통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는 그런 인생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본문에서 나사로는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부자 이야기를 드러내려는 장치로 나왔을 뿐입니다. 22(후)절부터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가 끝까지 이어집니다.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가는 세계를 성경은 ‘하데스’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부자는 여기서 고통받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데스의 불꽃으로 인한 고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나 봅니다. 25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가려고 해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는 명백합니다. 부자는 멋진 인생을 살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까, 나사로는 이제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는 게 마땅하고 부자는 하데스 음부의 세계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게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존경받는 부자로 살았던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2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과 비교하면 오늘 우리는 모두 억만장자로 사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를 따르면 우리는 모두 죽음 이후에 하데스에서 물 한방을 아쉬워하면서 고통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사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고통이고 괴로움이며 무엇이 위로인지를 우리는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아브라함 품과 하데스의 고통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은 죽음 이후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부자의 운명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견디기 힘든 괴로움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금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본문은 이해하기가 더더욱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서 부자의 삶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물 한 방울을 혀에 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아무도 상상할 수는 없으니까요. 앞에서 보았듯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의 호화로운 인생은 우리가 모두 바라는 삶입니다. 그를 향해서 대문 앞에 버려진 나사로 거지를 왜 돌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부자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을 충분하게 감당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오늘 우리가 사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합니다. 대충 흉내만 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찾아온 어떤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실망했던 그 사람처럼 우리도 비슷한 마인드로 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죽음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는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전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통속적인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런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선 사람은, 또는 돌아서기를 바라는 사람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염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약간이나마 맛보아야만 그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철저하게 유대교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서 나름 업적을 성취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대학교수나 판사가 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위치에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추구하던 것들이 오히려 자기의 영혼을 옥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자랑으로 여기던 종교 업적과 스펙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비유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가학적일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에서 점수가 떨어져도 공부 자체를 즐겁게 여기는 학생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이 전제되지 않으면 부자가 하데스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을 현학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절대 진리는 오히려 단순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인 부자 문제와 연결해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깨우침입니다. 주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수도원은 바로 그런 방식의 삶에 투철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의 삶을 두 단어로 압축하면 ‘기도와 노동’입니다. 거기서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배울 게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주로 하안거와 동안거 때 행하는 승려들의 식사입니다. 이를 발우공양(鉢盂供養)이라고 합니다. 발우는 그들이 사용하는 식기이고, 공양은 스승에게 음식을 바치는 걸 가리킵니다. 그들은 밥은 물론이고 반찬도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다 먹은 그릇에 물을 넣고 김치 한 조각으로 씻어서 김치 조각도 먹고 헹군 물도 마십니다. 그릇을 천으로 닦아서 발우를 제자리에 올려놓으면 끝입니다. 설거지가 필요 없습니다. 삶의 절대적인 차원이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기에 다른 것들은 대폭 줄어듭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과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던 오늘 본문의 부자와는 정반대입니다.
본문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요청합니다.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이 사는 세상에 보내서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가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까,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대답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매달립니다. 아브라함은 매정하게 대답합니다. 31절을 들어보십시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한쪽으로 굳어진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기 힘듭니다. 성경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말씀을 외우기도 하고, 말씀을 적은 천을 어깨에 걸치기도 하나 말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도 힘듭니다. 31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는 예수를 암시합니다. 예수께서도 바리새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비인격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세계관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이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거와 비슷합니다.
저의 설교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나 그들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세금을 그만큼 내고, 그 세금으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이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면 됩니다. 나름으로 호화롭게 사는 분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나 그분들을 못마땅해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태계를 너무 무너뜨려서 우리 후손들이 지구에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되는 상황만은 마음에 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대개 저와 비슷하게 생각할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부자들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기에 부자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재산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제가 아는 예수라는 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과는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는 완고한 고집쟁이는 아니시니까요.
하데스의 고통 문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문제는 부자였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데만 영혼이 기울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대문 앞에 버려진 나사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부자에게 나사로는 완전히 타자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완전히 타자이듯이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즐거운 인생 외에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니까요.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심리 상태를 가리켜서 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정신과 영혼 등등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와 고통이나 결핍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파토스(πάθoς)의 합성어입니다. 그런 상태가 본인에게는 속 편할지 모르나 영혼이 돌처럼 굳는 거니까 하데스의 고통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런 도착 심리 현상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나르시시즘적인 개인주의와 소비 자본주의가 극대화된 현대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경향이 흔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 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걸 사생결단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장애인의 복지보다는 자신들 동네의 아파트값이 떨어지는 걸 더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장애인 자녀가 있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요. 오늘날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비슷한 영혼으로 산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도 부자의 운명처럼 하데스의 고통에 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개인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모두 하데스와 비슷한 상황에 이미 들어갔는데도 그걸 느끼지 못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종아리에 생긴 상처가 곪아가는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하데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영혼을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해지기 전에 고통을 느끼는 게 그래도 더 낫습니다. 그래야만 치유의 길이 조금이라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경직되지 않고 생기로 가득할 수 있을까요? 생명의 근본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바꾸면 ‘하늘 나는 새’를 봐야겠지요. ‘들의 백합화’를 봐야겠지요. 그것만으로도 영혼이 출렁거릴 수 있어야겠지요. 요즘 표현으로 ‘심쿵’을 경험해야겠지요. 거지 나사로의 운명에 떨어진 사람과 공감할 수 있어야겠지요.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겠지요. 영적 통찰이 더 깊은 분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호화로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생명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정용섭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복음 가운데서의 삶 (딤후 2:8-15) / 정용섭 목사 (0) | 2025.10.15 |
|---|---|
| 극단적인 자기 낮춤 (눅 17:5-10) / 정용섭 목사 (1) | 2025.10.08 |
| 대속물로서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 (딤전 2:1-10) / 정용섭 목사 (2) | 2025.09.28 |
| 낮은 자리에 대해 (눅 14:1, 7-14) / 정용섭 목사 (0) | 2025.09.10 |
| 안식일의 본질 (사 58:9(b)-14) / 정용섭 목사 (1) | 2025.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