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낮은 자리에 대해 (눅 14:1, 7-14)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9. 10. 06:20

성령강림 후 12, 2025년 8월 31

 

 

자기를 낮추는 자

 

어떤 지도자급 바리새인이 예수 일행을 안식일에 초대했습니다. 맛난 거를 가득 준비하고 오락을 펼치면서 큰 파티를 여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안식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날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담소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정도의 모임이었을 겁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상석을 차지하는 걸 본 예수께서 따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는 상석에 앉지 말라고, 주인이 와서 그 자리에서 내려와달라고 하면 얼마나 민망하냐고 말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와서 상석으로 인도할 테고, 그게 자랑스럽지 않냐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낮추라는 이런 아포리즘은 뻔한 소리로 들립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비슷한 가르침을 수없이 남겼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이와 비슷한 뜻으로 말할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한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모입니다. 잘난척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모이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은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저 가르침을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덕 선생들처럼 착한 사람 만들고, 교양을 쌓게 하고, 어딘가 품위가 있어 보이게 하는 일에 관심이 있던 분이 아니까요. 지금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해 놓고 예수님의 행동거지를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도덕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컸기에 세리나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살던 그들이 실제로는 자기를 은근히 높이면서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실제 모습입니다. 겸손하지 않은데 겸손한 척하는 겁니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신 게 아닐는지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럴듯한 포즈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를 낮은 자리로 내려놓고 사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주변에서 누가 알아주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자기의 일상을 순전한 마음으로, 때로는 바보처럼 살아냅니다. 청소부 중에서도 성자가 있고, 간호사 중에도 성자가 있고, 교사 중에도 있고, 목수 중에도 있고, 전업 주부 중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남에게서 인정받는 것으로 삶의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사람은 칭찬에 따라서 실제로 크게 달라집니다. 그렇게 칭찬받으면서 성실하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성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아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가방끈이 짧거나 연봉이 적어도 초라하거나 궁색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다른 어떤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1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가 더 분명해질 겁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자 이웃을 초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초대받은 그들이 다시 당신들을 초대할까, 두렵다고 말입니다. 이상한 말입니다. 우리는 늘 기브앤테이크’(주고받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초대했는데 초대받지 못하면 서운합니다. 거꾸로 예수께서는 초대받는 게 오히려 두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잔치를 베풀려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갚을 것이 없는 이들을 초대하는 게 복되다는 이런 말씀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들립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갚음을 받는다는 복이 도대체 무얼까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끝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이나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을 초대하라는 말씀은 낮은 자리에서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이 경험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높은 자리와 갚을 능력이 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데에 익숙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주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데에 더더욱 신경을 씁니다. 거친 표현으로 크고 작은 관종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안식일 식사 자리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혼의 평화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즉 생명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씀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하나님 경험을 평화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예수 탄생 전승에서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 사람 중에 평화’( 2:14)라는 천사들의 합창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경험이 곧 영혼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영혼의 평화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평화를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아주 부잣집 아이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어른이 된 후 바나나가 흔해졌을 때 먹어보고 그 맛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평화도 그렇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만 민감하게 살아가니까 내면에 채워지는 평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걸 경험하지 못하니까 점점 더 외부적인 자극에 치우치게 됩니다. 이게 병적으로 나타나는 게 여러 가지의 중독 현상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세상에서 똑똑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영혼의 평화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도 영혼의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영혼의 평화는 감각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기에 대다수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예로 들겠습니다. 지금 설교문을 쓰면서 저는 왼편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봅니다. 위와 아래로 나뉘는 두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는 여전히 짙은 녹음이 우거진 앞동산입니다. 위로는 구름이 듬성듬성 뜬 하늘입니다. 아래 반은 산이고 위 반은 하늘입니다. 동편 풍경이기에 지금처럼 해가 서쪽으로 기운 시간에는 햇살이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평화의 기운을 실감합니다. 다른 무엇으로 채우지 않아도 충분하게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 지점인 요즘 저는 밤 10시 전후 손전등을 들고 종종 마당으로 나가거나 집 아래 동네 길까지 나갑니다. 시원한 밤 기온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빈집과 숲이 많은 우리 마을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하고, 몇몇 가로등과 주택 불빛이 보입니다. 새소리나 벌레 소리도 들립니다. 맑은 날이면 새카만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집니다. 제가 어릴 때 친구들과 밤에 집 밖에서 놀면서 보았던 그런 별빛입니다. 평화 자체입니다. 어떤 분들은 들꽃 하나만으로도 영혼의 평화를 경험할 겁니다.

 

자연에서만 이런 평화를 경험하는 건 아닙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복지가 좋아져서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많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서도 출근하듯이 도서관에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영천 도서관에 갑니다. 그곳에서 독서삼매에 빠진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그 어떤 걱정거리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평화를 경험하는 겁니다. 임종시설에서 돈 받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늘 죽음을 실감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죽음 앞에서 오히려 영혼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이 돈벌이보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람은 돈벌이 중심으로만 인생을 꾸립니다. 왜 그럴까요? 돈벌이가 영혼의 평화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요? 돈이 럭셔리한 삶을 보장하며, 그래야만 영혼의 평화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우리 인생살이에서 영혼의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영혼의 평화만 중요하지, 다른 세상살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속에서 때로는 비굴한 인생살이를 살아내야 합니다. 자존심 상해가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경쟁도 해야 하고,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멋도 낼 줄 알아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여가 활동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모든 고민거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자기를 높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삶의 태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일단 정확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정치인으로 살든지, 교사로 살든지, 현장 노동자로 살든지, 목사로 살든지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 성자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영혼의 평화가 풍요로워지고 있나요? 거꾸로 빈곤해지나요? 뭔가를 아는 척하는 설교자 당신은 영혼의 평화를 얻었는가,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시겠지요. 평화를 이미 얻은 것처럼 도사 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이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를 얻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예로 든 것들도 완전한 평화는 아닙니다. 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는 시인들도 반복해서 영혼의 평화를 잃습니다. 못된 성격 하나 극복하지 못합니다. 우울증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영혼의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당연히 전자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라고 말했겠지요.

 

완전한 평화를 얻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죽어야 완전한 평화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를 저는 지난 주일 설교 <안식일의 본질>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안식과 평화는 같은 뜻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죽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영혼의 평화를 살아있는 동안에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니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개는 포기하고 대충 요령으로 인생을 삽니다. 그럴듯하게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만 마음을 두게 됩니다. 잘난척하든지, 그게 안 되면 허세를 부립니다.

 

이미 죽은 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자신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장난 하지 마라, 하고 비난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었다는 것은 실제로 목숨이 끊겼다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죽은 겁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자랑거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자랑거리가 세상 살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목사들에게는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게 자랑거리겠지요. 신자들도 큰 교회에 다니는 걸 자랑합니다. 많은 이의 눈물과 기도와 헌신으로 이룬 것이니까 자랑할 만합니다. 그렇게 수고한 이들을 칭찬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신앙에서 보면 그런 것들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왜곡시킬 여지가 큽니다. 바울은 빌 3장에서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독실한 다른 사람들보다 내세울 게 훨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8-9()절을 들어보십시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무슨 말인가요? 당시 유대교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 앞에서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낮은 자리에 내려가도 전혀 불편한 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자유롭고 평화로워졌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는지요. 여러분은 현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이 실제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종교적 망상인가요? 대개 그리스도인은, 맞는 말이기는 하나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에 죽어야만 가능한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딱 떨어지는 대답을 저는 모릅니다. 다만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을 드리려고 제가 아는 예를 듭니다. 여기 5천 명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있고, 50명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누가 더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겠습니까? 큰 교회에는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일을 줄여도 자기 영혼을 돌볼 틈이 없습니다. 모임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고급 음식점에서 대접도 많이 받고, 선물도 많이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교회와 교회 업무와 신자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늘 그런 일로 쫓기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부활시에 갚음을 받을 일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게 바로 두려운 일입니다. 반면에 작은 교회 목사는 빈둥거리지만 않는다면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여러 종류의 책도 더 읽고 신자들과의 관계도 더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지 않아서 외롭거나, 경제적으로 쪼들릴지 모르나 영혼의 자유와 평화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근본에서는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생살이에서 낮은 자리에 내려갈까 전전긍긍하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잠들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거기서 여러분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