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안식일의 본질 (사 58:9(b)-14)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9. 5. 07:01

성령강림 후 11, 2025년 8월 24

 

 

십계명 4

 

십계명 4항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계명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 각 가정이나 회당에서 그들의 종교의식을 행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는 안식일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중에 안식일에 회당에 갔다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오고, 바울이 선교 활동 중에 주로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가 종교로 자리를 잡으면서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몇 가지 조치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는 313년에 그리스도교를 용인한 밀라노 칙령이고, 다른 하나는 321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을 휴일로 정하는 법령 선포입니다. 마침 일요일은 안식일이 지난 이른 새벽에 예수의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전통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문화를 따르는 거 아니냐 하는 불편한 생각도 불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의 일요일은 주일(Lord’s Day)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개신교회가 있기는 합니다. 안식교회라고 합니다. 공식 명칭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입니다. 토요일에도 학교와 관공서가 문을 열던 시절에는 그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토요일 휴일 제도가 우리나라에 정착하고는 그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토요일이냐, 주일이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안식일, 또는 주일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우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58:13절입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마라. 안식일은 기쁜 날 야훼께 바친 날은 귀한 날이라 불러라. 그 날을 존중하여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마라.'

 

안식일 규정에 관한 오리지널 텍스트는 출 20:8-11절입니다. 이 구절에는 노동 문제가 더 정확하게 언급됩니다. 10절만 읽겠습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들과 딸만이 아니라 종들도 일하면 안 됩니다. 가축도 일을 시키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불을 피우는 것도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 먹을거리를 미리 장만해 두었습니다. 안식일에는 걷지도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대략 오백 미터 이상을 걸으면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의 눈에 이런 안식일 규정이 촌스럽거나 너무 형식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입니다. 그 핵심 메시지는 무얼까요? 오늘 설교 제목으로 바꾸면, 안식일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일상과의 단절

 

앞에서 읽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쉰다는 말은 인생을 그저 놀고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릅니다. 노동에 혹사당하는 사람에게만 쉰다는 게 큰 의미로 경험됩니다. 남종과 여종들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 노동력을 저당잡힌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가능한 대로 종들의 노동력을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쉬는 날 없이 종들로 일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게 세상의 원리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회의 종들과 지금의 노동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처럼 어느 정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간 나라의 노동자들은 노동법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개별 노동 현장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는 주 52시간을 노동합니다.  45시간이 되면 기업가나 노동자가 다 만족할 수 있을까요?  30시간이 되면 어떨까요? 아니 주 20시간으로 줄어들면 어떨까요? 상상력을 더 발휘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인간의 모든 노동을 대신하고 인간은 말 그대로 아무 일 안 하면서도 잘 먹고 잘살면 어떨까요? 그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파라다이스(Paradise)일까요?

 

안식일에 아들과 딸과 남녀 종들까지 모든 사람이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곧 일상을 멈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을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일상에서 쓰고 있던 자기 가면을 벗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재벌 총수, 국회의원, 교수, 셀럽이라는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시원적 차원인 창조 사건 앞에서 그런 자랑거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라는 행성이 없었다면 지금 잘나가는 사람이나 나라나 제도도 없습니다. 기후학자들이 경고하듯이 지구의 평균 기온이 2, 3도 올라가면 대통령도 소용없고, 노벨문학상도 무의해지고, 맛집도 시들해집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에 일상을 멈춘다는 말은 여러분이 어머니 자궁 안에 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평소 일상에 뒤범벅이 되어서 이런 시원적인 차원을 다 놓치고 삽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지금의 자신만을 절대화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자기 안에 매몰시킵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큰일이 날것처럼 다그칩니다. 그러니 다른 게 눈에 안 보이고, 일분일초도 쉴 줄 모릅니다. 똑똑한 사람만 사람 취급하려고 합니다. 온갖 엔터테인먼트가 대한민국 문화를 지배하고 있으나 한국 사람의 삶은 안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옛날에 비해서 개인의 자유 시간은 늘어났는지 모르겠으니 참된 의미에서 안식은 없습니다. ‘K 컬쳐다 뭐다 해서, 아주 잘나가는 듯한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평균의 두 배라고 합니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이런 템포로 살아도 괜찮은가요?

 

안식일에 일상을 멈추라는 선언은 혁명적인 겁니다. 일하지 않고 쉬려면 성장을 포기해야만 하니까요. 만약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상당한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경제 성장보다는 경제 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을 모읍시다.”라고 담화를 낸다면 국민이 하야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끌어내리겠다.”라고 아우성칠 겁니다. 인간이 지구에서 사는 한 무한 성장은 아예 불가능한 꿈인데도 이런 성장 이데올로기가 먹히는 이유는 정치 지도자들과 세계 재벌급 기업가들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낙오가 되면 큰일날 듯이 말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아파트 투기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돈을 벌 기회가 없다고 부추기는 세력이 그런 이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고액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아이들의 미래가 없다고 위협하는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잠시 멈추곤 했습니다. 너무 빨리 달려서 자기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면 안 되니까요. 대한민국 사람은 총체적으로 쫓기듯이 불안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안식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나요. 오늘 우리는 약간 세련되고 교양이 묻어나는 지옥을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지울 수 없습니다.

 

해방의 날

 

안식일 전승은 앞에서 짚은 출애굽기만이 아니라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20:11)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안식일 규정의 근거로 삼고, 신명기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근거로 삼습니다.  5:15절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은 고대 유대인들의 신앙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출애굽으로 인해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해방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위 구절에 따르면 안식일은 인간 해방의 능력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해방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극심한 경쟁 논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긴 자는 그걸 유지하려고 하고, 패배한 자는 극복하거나 자포자기합니다. 돈도 많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해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 듯한 사람도 실제로는 억압적으로 사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떤 때는 그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질병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삶의 해방을 경험할까요? 복음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누리고 있을까요? 교회마다 다르고, 개인마다 다르기에 한마디로 끊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자유와 해방과 안식이 없거나 크게 부족합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신앙생활까지 경쟁적인 현상을 보인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대형 교회에서 당회원 장로가 되려면 신앙생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시험에 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회나 총회 정치로 들어가면 더 심한 일도 벌어집니다. 총회장이 되려고 교회 돈을 많이 씁니다. 신학대학 총장 선거에도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이런 일에 마음을 두니까 해방과 자유와 안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의 셋째 말씀인 눅 13:10-17절에는 안식일에 관련된 일화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던 장애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예수가 어겼다고 비판했습니다. 거기 모인 이들에게 이런 장애인 고치는 일은 오늘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는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알렸습니다. 예수께서는 15-16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덞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이와 비슷한 일은 막 2:23-28절에도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런 발언이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신 분이기에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안식

 

저는 앞에서 안식일의 본질이 창조와 출애굽에 놓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식일 전승을 말하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설명했습니다. 저는 안식일에는 훨씬 근본적인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믿지 않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시끄럽고 복잡한 일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그래서 경치 좋은 곳에서 편히 쉬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가능한 한 여유롭게 사는 건 좋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지 안식은 아닙니다.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안식은 궁극적인 평화입니다. 그 무엇으로 보충하지 않아도 되는 충만한 평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됩니다. 안식일은 바로 이런 평화를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상을 멈춰야 합니다. 일상이 멈춰도,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그 일상에서 벌어지는 오락과 재미가 없어도 아쉬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안식은 죽음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영원한 안식이나 영원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죽은 시체를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몇 번 보았습니다. ‘죽은 자만 불쌍하지.’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도 않습니다. 허세나 위선을 떨지도 않습니다. 일상에서의 완전한 해방입니다. 평생 수행 정진을 통해서 높은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아직은 살았으나 죽은 듯이 살아가는 고승들에게서 볼 수 있는 깊이를 거기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죽음을 예찬하려는 게 아닙니다. 죽음과 같은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원한 안식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식일를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곧 죽음 연습입니다. 일상의 그 격렬함과 치열성이 완전하게 제거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날이니까요.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통한 영원한 안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일상과 완전히 단절되는 죽음을 용감하게 돌파하지 못합니다. 허무하게 죽든지, 그 죽음이라는 실존의 어두움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죽기 싫다고 발버둥 치면서 죽게 되겠지요. 안식일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안식을 희망하면서 죽음을 맞아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안식일의 본질이라 할 영원한 안식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걸 희망하고 있으신가요? 영원한 안식까지 갈 거 없이, 지금 여기서 참된 쉼과 자유와 평화와 해방을 점점 더 풍성하게 경험하십니까? 아니면 여러 가지 일과 세력에게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쫓기듯이 사십니까? 그래서 사소한 말로 기분이 상하고, 온갖 신경성 장애를 겪고 계신 건 아닌가요? 예수를 만나기 전의 18년 장애였던 여자의 처지는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의 주인이신 분을 다시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1:28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고 본질입니다. 그에게 가까이 간다면 이사야가 58:14절에서 약속했듯이 여러분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