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믿음의 길 (히 11:1-3, 8-16)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8. 20. 06:21

성령강림 후 9, 2025년 8월 10

 

 

휘포스타시스

 

 11:1절은 한번 읽어서 무슨 말인지 전달이 잘 안 됩니다.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거기에 나오는 단어 자체가 독특한 개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 단어는 믿음과 실상입니다. 여기서 실상이 문제입니다. 헬라어 πόστασις(휘포스타시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가 히 1:3절에도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은 같은 단어를 여기서는 본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 실상과 본체는 느낌이 다른데 말입니다. ‘한 본질과 세 실체라는 삼위일체 논쟁에서는 휘포스타시스가 실체로 표기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하나님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 각각 분명한 세 실체이면서 하나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휘포스타시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장 확실하게 한다고 말한 겁니다.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도 동의할까요? 세상 사람들의 동의를 묻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이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삶의 확실성을 얻는 데에는 믿음이 아니라 앎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아는 게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경구는 16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태어난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다고 하지요. 그가 말하는 앎은 자연과학적 지식입니다.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그 절정은 오늘날의 인공지능(AI)입니다. 인공지능이 머지않아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에 이를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능시험이나 변호사 시험에서 인공지능이 이미 상위 5% 내의 성적을 낸다고 합니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나면 상위 1% 0.1% 수준에 도달하겠지요.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인공지능이 아니라 단순한 계산기도 사람이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계산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국가 정책도 정치인이나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해서 대답을 얻으면 간단할 겁니다. 이런 흐름으로만 본다면 인공지능이 전지전능의 신으로 등극하는 순간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자연과학의 본질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보름달을 보셨는지요. 옛날 사람들은 해와 지구와 달의 물리적 관계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뉴턴에 의해서 중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구의 중력과 달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달이 계속 지구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중력이 왜 작용하는지는 뉴턴도 몰랐습니다. 훗날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공간이 휘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휘어진 공간을 자연스럽게 도는 중입니다. 앞으로 다른 천체 원리가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너무 깊고 다층적이어서 인간의 자연과학으로는 부분적인 것만 밝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인공지능에는 실체적 경험이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사과를 직접 먹어본 적이 없으면서 사과에 관한 정보만 많이 압니다. 서울에 가 본 적이 없으면서 서울에 관해서 그럴듯한 많은 이야기를 할 줄 압니다. 도움은 되겠으나 하나님처럼 믿을 대상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야구 같은 스포츠입니다. 야구를 잘하려면 코치에게서 레슨을 받고 연습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야구 배트와 자기 몸과 공이 하나가 되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설명으로 가능하지 않은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설명을 들어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근원적인 원리를 깨달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불립문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언어모델이라서 문자 너머의 세계를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인공지능은 죽음을 모르기에 생명도 모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지식)이 우리가 삶의 확실성을 얻는 데서 결정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앎이 아예 필요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앎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제대로 믿을 거 아닙니까. 신학은 바로 앎, 즉 인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 종말은 세상의 마지막을 가리키기도 하나 선취의 방식으로 일어난 오늘의 사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종적 미래이면서 오늘의 생명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이런 신학적인 앎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걸 안다고 해서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는 건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실제로 사랑의 능력을 얻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절대적 믿음

 

다시 히 1:1절을 조금 더 자세하게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실상과 증거는 비슷한 뜻입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확실하게 될 대상을 두 가지 언급합니다.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바라는 것들은 희망하는(hope)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희망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라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을 차용해서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헬라 신화 판도라의 상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판도라라는 여신은 뚜껑을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 비밀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온갖 불행이 거기서 쏟아졌습니다. 죽음, 고독, 배신, 질병 등등입니다. 급하게 뚜껑을 닫았습니다. 한 가지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인간은 온갖 실존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거꾸로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것은 몽땅 불행한 것이니까 희망도 불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희망에 속는다고 말입니다. 희망이 망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이비 이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는 현대인의 희망도 망상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희망이 자리를 잡고 있나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확실성은 정말 확실한가요?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당시 그리스도교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희망의 근거가 취약해졌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휘포스타시스가 크게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예수 재림의 지연입니다. 그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지성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문제를 빌미로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교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은 예수 재림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제공한다고 여겼던 삶의 궁극적인 의미들을 세상이 제공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삶의 재미가 스마트폰으로 해결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공지능과 스마트폰이 완벽하게 결합하면 더는 종교가 설 자리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비유적으로 알코올이나 마약에 완전히 중독된 사람들에게 고난도 감당해야 할 현실의 삶이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는 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확실성에 이르려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는 히브리서의 가르침이 실제로 말이 되나요? 혹시 광신에 떨어지는 건 아닐까요?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이성적인 광신이나 미신에 떨어지지는 않되 이성과 합리성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믿음의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재림을 신앙고백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길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의 길에서만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세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왔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는 11:17절 이하에서 이를 짚었습니다. 그 뒤로 출애굽과 홍해와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열거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11:32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 믿음의 전통이 오늘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이어진다는 게,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완성된다는 게 히브리서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12:2절에서 믿음의 핵심 내용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히브리서 당시까지 예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날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서 많은 이들이 낙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는 믿음만이 희망하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실하게 한다고 외칩니다. 지난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믿음으로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믿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믿음의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앞에서 저는 믿음보다는 과학적인 앎과 정보에 더 치중하는 세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철저하게 지배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보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유물론이니까 제쳐 놓아도 됩니다. 자본주의도 사실은 유물론적입니다. 돈과 인과율에 근거한 과학주의와 성공에 대한 갈망이 현대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을 삶의 확실한 근거로 삶을 수 있나요? 이게 말이 되나요?

 

세상 원리를 넘어서

 

믿음으로 산다는 건 삶의 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것들을 너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에서 이미 지구의 중력과 휘어진 공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기는 힘드나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서 시간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원리적으로만 말하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분들은 빨리 움직이면 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확실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 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깊고 더 넓은 세계가 우리를 휩싸고 있어서 우리는 늘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조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기 연봉 3천만 원으로 사는 가정이 있고, 3억 원으로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당연히 3억 원을 버는 가정이 더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게 세상 원리입니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는 하나, 그게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른 요인들이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런데 삶의 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본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세상 원리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8.15 광복 80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당시에 남북 분단이 80년 이상 될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남북 분단이 숙명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북통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역사의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고품질의 기상관측 장비를 이용해도 한 달 후의 날씨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홀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믿는 시늉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니까, 남북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기도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들에게서 절대적인 믿음이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걱정이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믿음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믿음은 어린아이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똑똑하게 살아보라고 하십시오. 세상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야망으로 살아보라고 하십시오. 조금도 손해보지 않고 세상의 인기를 다 누리면서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십시오. 그럴수록 그는 믿음의 길이 아니라 의심의 길을 갑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면 주변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평생 의심하면서 살겠지요. 결과적으로 그는 휘포스타시스를 얻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만 얻습니다. 안식이 아니라 불안에 휩싸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라는 책에서 스마트폰과 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에 청소년들의 뇌가 망가졌다고 진단합니다. 어릴 때부터 경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니까 불안 심리에 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느 세대 청소년들보다 더 똑똑해지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누리게 되었는데, 마음은 더 불안해진 세대입니다.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세대가 불안을 그 특징으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믿음의 전통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생명의 실체(휘포스타시스), 즉 구원의 확실성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