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거짓 선지자들 (렘 23:23-29)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8. 26. 04:54

 성령강림 후 10, 2025년 8월 17

 

 

예레미야

 

예수께서 30대 중반의 나이에 폭력적으로 로마 제국을 전복하려는 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사형 제도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대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서 제거하려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다는 복음서의 보도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긴 합니다. 여기에 예루살렘 민중들도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태형으로 끝내려고 하자 예루살렘 민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구약 선지자 중에서 예수와 비슷한 처지에 몰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입니다. 그 내용이 렘 26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들이 듣기에 불편한 설교였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26:8) 하고 위협을 가했습니다. 인민 재판의 분위기였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왕궁 고관들이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 11절에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거기에 모인 고관들과 백성에게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일촉즉발의 순간입니다. 누가 불을 끌어당기면 모든 걸 태워버릴 듯한 기세입니다. 그들의 손에 이미 돌이 들려있을지도 모릅니다. 14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라.” 그리고 15절에서 이런 말을 붙입니다.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예레미야의 이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는 제사장들과 여러 선지자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4절에 따르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죽이려고 한 이유는 예레미야가 동료 선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양쪽의 대결이 23:9절부터 28:17절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것만 본다면 마치 정적들의 싸움과 비슷합니다. 이 싸움이 예레미야에게 크게 불리했습니다. 우선 숫자에서 밀렸습니다. 예레미야는 혼자이고, 저쪽은 큰 무리를 이뤘습니다. 어느 쪽 말이 옳은지는 당장 결론이 나지 않기에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저쪽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당연히 예레미야의 주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역부족인 이런 상황에서는 싸워봐야 승산이 없습니다. 자칫 신상에 큰 문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기 안위를 위해서 그냥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당장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자기와 맞선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을 왜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했는지를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렘 23:23-2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꿈꾸는 선지자들

 

예레미야가 볼 때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신탁이 꿈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25절을 들어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어떤 한 사람의 꿈은 제삼자가 나서서 왈가왈부하기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종교적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이 꿈 이야기를 하면 먹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꿈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현상은 아닙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꿈은 무의식의 발로라고 합니다. 깨어있을 때는 무의식이 억제되니까 문제가 없으나 잠들면 그 무의식 제어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악몽을 자주 꾸기도 합니다. 평소에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을 꿈에서 겪기도 합니다. 평소 과대망상이 있는 사람들은 왕자나 공주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겠지요. 수백억 원 복권이 당첨되기도 하고요. 저에게도 언짢은 꿈이 있고, 기분 좋은 꿈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은하수와 붉은 노을이 꿈에 나와서 잠이 깬 뒤로도 한참이나 마음이 즐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악몽은 늘 비슷합니다.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섰는데 원고가 없거나 먼 지역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는 꿈입니다.

 

저는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꿈 자체보다는 그런 꿈을 꾸게 되는 사람의 정신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평소에 옳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이 그 사람의 무의식에 자리합니다. 거꾸로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삶을 건강하게 살지 못하기에 그의 무의식도 그런 정신에 지배받습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어떤 트라우마가 우리의 무의식을 괴롭힐 수 있으나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면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수행의 차원에서 이어가면 여러 가지 심리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시나브로 영혼의 안정을 찾게 됩니다. 육체가 허약한 사람이라도 헬스나 요가를 꾸준하게 실천하면 건강한 육체를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평소에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병들었으니까 그들의 꿈도 헛된 꿈입니다. 그들의 판단력도 부실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미 앞 구절인 23:16절에서 그런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들의 말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의 깊이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얄팍한 인생 경험이나 근거 없는 망상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거짓 선지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바알 숭배입니다. 27절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위 구절이 저에게는 현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나 교육학자나 종교학자의 분석보다 더 심층적인 말씀으로 들립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평소에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바알 숭배는 조상 시대부터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바알은 가나안 지역의 토착신()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바알이 풍년을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풍년은 다산으로 이어집니다. 풍년과 다산을 중심으로 하는 유무형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모두가 꿈꾸듯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입니다.

 

고대 유대 백성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의 행군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본 세상은 별천지였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자기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풍요롭게 살았으니까요.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지금 동남아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부러워하듯이 말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선포했던 십계명과 온갖 율법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도 결국에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신탁의 포퓰리즘인 셈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사니까 영혼이 병들게 되고 역사를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허황된 꿈만 꿉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바벨론 제국을 막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대중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 골라서 선포했습니다.

 

바알 숭배와 말기 자본주의

 

저는 바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말기 자본주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지는 않으나 삶의 내용은 다를 게 없습니다. 자본과 돈과 무역수지와 GDP와 연봉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즉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당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던 유대인들도 점점 더 가나안 사람들의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따라갔습니다. 소시민들만이 아니라 종교 엘리트들인 선지자들도 바알 이데올로기를 따랐습니다.

 

그게 뭐가 나쁜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뭐야, 하고 속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알을 섬긴다고 해서 당장 삶이 망가지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겉으로 더 호화롭고 세련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결국에는 정신이 병든다는 것입니다. 부자로 잘사는 꿈만 꾸고 있으니까, 정신이 병들지 않을 수 있나요? 일례로, 미국의 경제 문제를 외국 탓으로 여기고 세계 모든 나라를 향해서 조폭처럼 내 말을 들을래 듣지 않을래.’ 하고 관세 전쟁을 벌이는 트럼프의 정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요?

 

예레미야가 볼 때 바알 숭배는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27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로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겉으로야 여호와를 들먹이겠으나 실제로는 여호와를 외면하게 합니다. 저는 말기 자본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니까 자기의 종교적 꿈과 야망만을 말합니다. 그런 데에 길든 신자들의 영혼은 잠들게 됩니다. 재미로만 교회에 나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알량한 도덕성과 개혁성을 내세웁니다.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수준에서 만족해합니다. 일종의 종교 동호회 수준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조금 개량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예레미야는 29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말 강력한 선포입니다. 여러분 모두 꼭 기억해 두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은 불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서 바꾸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불로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기도문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나라와 권능과 능력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는 표현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달리 바알이 제공하는 풍년과 다산 이데올로기에 솔깃해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단순한 풍요와 재미만 있으면 됩니다. 삶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해지고, 그러다 보니 삶이 불안해집니다.

 

뉴욕대학교 스턴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불안 세대(The Anxious Generation)라는 본인의 저서에서 21세기에 태어난 청소년들을 불안 세대라고 규정합니다. 스마트폰과 SNS의 남용으로 그들의 뇌가 병들었다고 진단합니다. 청소년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과 선동에 세뇌당하는 겁니다. 그들을 불안 세대라고 하는 하이트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저는 청소년 세대만이 아니라 21세기 오늘 모든 세대가 불안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건강검진을 많이 하는 나라도 흔치 않을 겁니다. 패키지 검진 상품도 있습니다. 싸게는 50만 원, 비싸면 2백만 원을 호가합니다.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류마티스 내과 의사 김현아 교수의 없던 병도 만드는 건강검진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어렴풋하게 생각하던 문제를 전문가의 식견으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시더군요. 검사를 자세하게 할수록 사람의 몸에서는 뭔가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기에 그냥 지나가도 될만한 것들을 찾아내서 처리한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갑상선 암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대장 내시경 검사는 물론이고 위내시경도 받지 않았는데, 이제는 70살이 넘어서 더 안심하고 암 검사는 받지 않습니다. 제가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라 완벽한 건강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이런 일에 제 삶의 에너지를 쓰기 싫다는 겁니다. 그런 시간이 있으면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고, 바위를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인 하나님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불로서의 하나님 경험

 

도대체 불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장 간단한 일을 하나의 비유로 들겠습니다. 우리집에서 진공청소기는 제 담당입니다. 우리 집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 작업도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청소기를 미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하면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시시한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수백만 년 전 두 발로 걷기 시작했던 호모 에렉투스의 후예라는 게 여기서 증명되는 거니까요. 제가 뇌출혈이나 무릎 관절 손상으로 6개월 동안 침대 신세를 졌다고 합시다. 다행스럽게 치료가 되어서 조금 기운을 차리고 침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청소기를 돌립니다. 부엌에 놓인 식탁과 의자와 화분 받침 등등의 위치를 계산하면서 천천히 청소기를 밀고 갑니다.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불을 처음 본 아이가 겪을만한 이런 놀라움과 충격을 일상에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카페나 식당 청소일을 하면서 늙어가는 인생도 멋지겠지요. 소파에 앉아서 티브이 드라마를 돌려보는 삶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원이니까요.

 

자연주의적 삶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태도로 인생을 나름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도 많습니다. 소로우의 월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이들과 친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청소와 노동과 자연의 영적인 깊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생명의 신비와 자연을 예찬하는 삶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고, 더 밑으로 내려가고, 더 위로 올라갑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자기 집착과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영생 경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진정한 입니다. 오늘의 셋째 말씀인 눅 12:49절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을 불을 던지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불을 경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거들먹거리는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과 선동에 세뇌당하지 않습니다. 속지 않습니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삶의 시야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