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독특한 문장을 손에 꼽으라고 한다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딤전 2:5절을 택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원초적 신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중보자의 역할은 양쪽 중간에서 타협을 중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아무나 중재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런 역할에 가장 가까이 간 인물은 모세입니다.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후광으로 인해서 그를 직접 쳐다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직접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민족 영도자였던 모세는 하나님과 유대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어서 매우 안타까웠을 겁니다. 그는 대신 율법만 남겼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율법을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를 율법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보자
오늘 설교 본문은 유대교 전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중보자가 세 단어로 표기되었습니다. 사람(ἄνθρωπος), 그리스도(Χριστὸς), 예수(Ἰησοῦς)입니다.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 세 단어가 가리키는 핵심은 사람이면서 그리스도인 예수가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그리스도는 아니었던 모세와 비슷한 인물은 인류 역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참칭하는 사이비들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교회 전통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라는 사람만이 유일한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현대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왜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중보자 개념은 신화적인 세계에 살고 있던 고대인들의 생각이지 첨단 문명 세계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보자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아주 근본적인 사태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면 궁극적인 생명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와 궁극적인 생명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나 넘을 수 없는 담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과 가족과 친구와 재산과 권력과 명예를 상당한 수준에서 누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생명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인생살이를 성취했는데도 더 많은 걸 끊임없이 욕망합니다. 더 건강하고, 더 소유하고, 더 권력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무언가를 자기 안에 채우고 성취하려고 애씁니다. 개인들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나라들도 그렇습니다.
조지아주에서 공장 시설을 제작하던 현대 직원들을 트럼프의 미국이 비자 문제로 무더기로 체포하여 마치 전쟁 포로를 다루듯이 수용 시절에 가둔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인생살이를 거의 전쟁놀이처럼 여깁니다. 이런 세상의 메커니즘과 패턴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만, 즉 전쟁 승리에서만 나름으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승리의 쾌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수능 전국 1등을 한 학생이 느끼는 성취감이 지속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이 상당한 정도로 율법을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율법의 한계로 인해서 좌절했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한계성을 뚫어보았기에 오늘 본문이 중보자를 말하는 겁니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대속물
사람이며 그리스도인 예수가 중보자라는 이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6절에 나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대속물은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희생 번제를 드렸습니다. 자기 피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대신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그 동물이 대속물입니다. 그런 희생 번제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까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의식을 전업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신약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희생 번제를 완성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앞에서 설명한 중보자라는 용어보다 대속물이라는 용어가 현대인에게는 더 낯설게 들릴지 모릅니다. 낯선 정도가 아니라 약간 괴기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대속물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기도문도 읽고 찬송가도 불렀던 여러분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드렸다는 저 구절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왜 대신 죽느냐고, 그의 죽음이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주장할 겁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들어보셨을 겁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입구에서 분신자살했습니다. 당시 스물두 살 청년이었습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와 재단사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한계에 부딪힌 그는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바친 겁니다. 일종의 대속물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겨울 공화국 같았던 대한민국 노동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신학 계열의 사람들은 그를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대속물이라는 단어에 대한 비유로 전태일 이야기를 한 것이지 그를 실제로 작은 예수라거나 그가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중보자, 즉 만민을 위한 대속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는 말을 이미 주어진 각본에 따라서 그런 일이 기계적으로 일어난 듯이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가운데서 일어난 일종의 신학적 생기(生氣) 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참된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한 사랑으로 경험하는 세상입니다. 기쁨과 평화와 자유가 충만해지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 같아집니다. 사자가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양과 이리가 함께 어울립니다. 그런 나라가 이미 여기에 왔다고 믿었고, 그렇게 꿈꾸었고, 그런 나라를 갈망했던 예수에게 예상하지 못한 운명이 들이닥쳤습니다. 십자가 처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당황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훗날 그들은 천천히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라고 말입니다.
‘대속물’ 개념의 깊이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대속물로서의 예수 죽음은 결국에는 제자들의 해석이고 생각일 뿐이지 ‘진짜’ 진리는 아닌 거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진리의 속성이 본래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확정된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의학 등등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딤전 2:4절이 말하는 진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며, 느끼는 사람은 느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느끼지 못합니다. 귀 있는 자만 듣습니다. 진리(ἀληθεία)라는 헬라어의 본래 뜻은 탈이라는 뜻의 접두사 ‘아’와 망각이라는 뜻의 ‘레테이아’의 합성어로, 보통 탈(脫)은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나오는 망각의 강이 레테의 강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도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교부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고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라고 깨달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교가 진리의 차원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4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설교 본문에 두 번이나 반복되었듯이 만인 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가득 채웠던 생각입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만’ 구원받을 거야, 하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만약 똑똑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만 구원받는다면, 그런 사람들만 세상에서 인정받고 행복할 수 있다면 만인 구원을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만인 구원을 전제해야만 중보자와 대속물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만민 구원과는 반대의 길을 갑니다. 서로를 소외시킵니다.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전쟁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일에, 그리고 군인 만들기에 엄청난 재정이 투입됩니다. 자기와 자기편만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도 구원받나, 부도덕한 사람까지 받아들어야 하나, 성실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을 나눠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나, 등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는 합니다. 그런 모든 문제를 우리가 아직 완벽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근본에서는 우리가 세상과 역사와 삶에 관해서 아는 것은 다 부분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만민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런 일에 쓰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삶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의 삶이 여러모로 피곤하기도 하고, 거꾸로 달콤하기도 해서 그냥 현실에 안주하기가 쉽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그의 제자라면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안으로 깊이 들어가려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겠지요.
그리스도교 구원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이기도 한 이 두 가지가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나, 저는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업적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최고 문명도 생명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파괴했습니다. 고상한 인격과 교양이 있었으나 생명 충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름 럭셔리하고 품위있게 사는 사람들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근심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회 지위가 높아도 더 높아지려는 욕망과 그것을 유지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니면 막무가내로 무덤덤하게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으니까요. 권력 심리학의 대가인 브라이언 클라스의 강연 <권력은 왜 부패하는가> 영상을 ‘EBS 지식’ 유튜브 방송에서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최고 정치 지도자가 되면 안 될 사람들이 그 권력에 더 열광적으로 매달린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특성은 세 가지, 사이코패스와 마키아벨리즘과 나르시시즘입니다. 역설적으로 대중들은 ‘스트롱맨’으로 표상되는 이런 성격의 지도자들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진화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 교수는 이 세 가지를 어두운 심리의 세 요소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도 조금씩 들어 있는 심리 현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아도 된다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아도 된다면, 즉 그들은 죄가 없다면 예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해야 한다는 유혹과 강요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닦달당합니다. 저는 ‘오징어 게임’과 ‘케데헌’ 현상을 비롯한 K-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는다고 논평하는 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합니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시반이나 의대반을 꾸리는 나라가 우리 외에 또 있을까요? 청소년 자살률과 노인 자살률이 우리보다 높은 나라가 또 있을까요? 거의 각자도생에 떨어진 개신교회가 한국 외에 또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속물로 바치셨기에 우리는 이런 강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실감이 안 되나요? 경쟁에서 도태되면 ‘죽음이야.’라는 생각이 더 강한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가슴은 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참된 자유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로서 대속물이신 '예수'와 함께 여러분의 일상을 자유인으로 살아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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