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극단적인 자기 낮춤 (눅 17:5-10)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0. 8. 07:53

창조절 5, 2025년 10월 5

 

 

겨자씨 믿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입에 달고 살기는 하나 믿음의 세계와 그 능력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믿음에 관한 교리를 공부한다거나 믿습니다!”라는 구호를 열광적으로 외친다고 해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눅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비유적으로 차 마시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벌컥거리면서 아무 생각이나 느낌 없이 마시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마시지만 마시는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진짜 차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사람은 향과 맛과 식감 등등을 다 실감합니다. 차와 자기와 일치하는 경험까지 나아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7:5절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예 믿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부족하다고 느꼈나 봅니다. 그들이 그런 요청을 하게 된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앞 대목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잘못한 사람이 매번 용서를 구하면 일곱 번 모두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식으로 스토커 같은 이들도 용서하라는 말이 됩니다. 이건 실제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게 능사도 아니고요.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일곱 번 운운하시니까, 제자들은 당혹스러워서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했나 봅니다. 예수께서 6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께서는 일곱 번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일곱 번 용서는 강압으로 마지못해 할 수 있으나 뭍에서 자라는 뽕나무에 명령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속으로 예수님도 저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이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당시 제자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도대체 예수께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믿음이 무슨 초능력쯤 된다는 말일까요? 제자들의 이런 마음을 헤아린 예수께서는 이제 7절부터 10절까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종(δολος)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밭을 갈고 양을 키워야 합니다. 종일 밭일을 끝내고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차려놓은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피곤해도 주인을 위해서 밥을 준비해야 하고, 주인이 밥 먹는 동안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주인의 식사가 끝난 뒤에야 그는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일에 충실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잣대로 본다면 인권 유린도 이런 인권 유린이 없습니다. 자기 집 종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주인의 행태는 인권위나 노동관계 기관에 고발당해야 합니다. 결론인 10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자기를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라니, 이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쓸모없다는 뜻인데, 이런 말은 아무리 사회적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도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쓸모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최소한이 아니라 가능하면 갑절의 대우를 받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일할 맛이 나고 살맛이 납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각자가 자부심을 느끼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익한 종으로 여기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예수께서 자기를 비하하라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물론 아닙니다. 자기의 정당한 권한을 찾으려는 투쟁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익한 종의 영성, 오늘 설교 제목인 극단적인 자기 낮춤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으면 제자들이 받기를 원했던 믿음의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이를 노골적인 용어로 바꾸면 자기를 자격 미달자로 여겨야만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정 투쟁이 만연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이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너무 멀게 들리긴 합니다.

 

인간 실존

 

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종교적 수사나 교양적 훈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말씀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자격 미달자라는 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여기 교사로 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교사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느 정도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지식에서나 인격에서나 정서와 심리에서도 학생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대학교수나 의사나 법관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암 말기 환자가 자연 치유되는 현상을 의사들은 알지 못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할 자격이 있는 목사는 없습니다. 매 주일 설교하는 저도 역시 자격이 없습니다. 성경의 깊이에서 모르는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학 정보로는 조금 알아도 실체로는 잘 모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도 근본에서는 모두 자격 미달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정책이 어떤 결과는 가져올지 알지 못합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도 되겠지요. 소시민으로서 우리는 부모로서 자격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부모로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아기를 낳아서 키웁니다. 시행착오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로 살아갈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데도 결혼해서 삽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무언가에 유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무익한 종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정말 희생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유익하게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그렇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은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십중팔구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여길 겁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자기를 높이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데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길든 겁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바꾸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게 왜 착각인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알기에 귀중한 설교 시간에 길게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어리석은 왕 옆에 간신이 모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왕의 됨됨이는 거지인데 어쩌다가 왕이 되었으니까 그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을 못 견딥니다. 간신들의 아첨만이 그를 지탱해 줍니다. 저 사람은 참 인격자야, 저 사람은 위대한 설교자야, 하나님의 큰 종이야, 저 사람은 애국자야, 저 집안은 행복이 넘쳐나는 거 같아, 저 부부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거 같아, 하는 말을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많은 이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간신의 아첨으로 작용합니다. 앞에서 이미 짚었듯이 그렇게 인정받을 정도로 고상한 인격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할 수 있고, 부부가 어떻게 늘 사랑할 수 있나요. 개인에 따라서 차이는 있으나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사랑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영혼이 피로해집니다. 영혼이 피로해지면 믿음의 세계에서 멀어집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극도로 경계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런 율법주의가 오늘날 실제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여겨야만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고상한 관념도 아닙니다. 도사 같은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다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보십시오. 노숙자처럼 실제로 낮은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삶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삶이 가벼워지는 겁니다. 우리의 지식, 소유, 명예, 업적 등이 짊어져야 할 자랑거리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삶이 가벼워져야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벼워야만 다른 교우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28-30)라고 말씀한 게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의 삶과 신앙생활이 무거운가요, 가벼운가요?

 

자기 삶을 나름대로 성취하려는 사람들의 열정을 제가 깎아내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저는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젊은 시절 밤새워 책을 읽고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일주일 내도록 실험에 몰두하는 연구원들도 많습니다. 가족과 함께 먹고살려고 현장에서 땀 흘리면서 노동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공장에서 일하고, 택배 일을 하고, 대리기사도 하고, 식당 종업원이나 노인 요양보호사로 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처럼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 주인 밥상을 차리고 시중을 듭니다. 귀한 일입니다.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삶에서 힘이 빠지고, 힘이 빠져야만 영혼이 자유로워지며, 영혼이 자유로워져야만 자기의 삶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낮은 자리, 죽음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종교적 수사나 훈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듯이 우리 인간은 예외없이 누구나 극단적인 자기 낮춤의 차원에 곧 떨어집니다. 아무리 외면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죽음의 순간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삶은 본질에서 죽으려고 산다.’라는 모순을 벗어날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의허송세월이라는 산문집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이 형뻘 되는 이의 화장터에 갔다고 합니다. 관이 소각로로 들어가자,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글자가 떴고, 40분 지나니 소각 완료라 뜬 다음, 다시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뜨고 10분이 지나자,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전에는 100분이었는데, 이제는 기술이 좋아져서 5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며칠 전까지 살아있던 한 인간이 50분 만에 한 되 반 정도의 흰 뼛가루가 되었습니다. 뼛가루 입자는 너무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습니다. 이보다 더 낮은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극단적인 자기 낮춤의 자리입니다. 득달같이 임하는 이런 운명 앞에서 인간이 살아있을 때 높으면 얼마나 높겠습니까. 극단적인 낮은 자리에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살아있을 때 경험해야만 바로 앞에서 짚었듯이 삶이 가벼워지겠지요. 그게 자유이겠고요.

 

저는 하나님 경험이 바로 극단적으로 낮은 자리인 죽음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인 죽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경험도 곧 죽음 경험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고, 그리스도교 역사에도 나옵니다.  15장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바치는 중에 일어난 일을 12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큰 흑암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사라지는 경험입니다. 우주의 나이인 138억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흑암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까. 1천억 개 이상의 태양이 모인 은하계가 우주에는 1천억 개 이상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흑암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나요. 하나님 경험은 마치 세균 한 마리가 코끼리를 직면하는 것보다 더 엄중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절감합니다. 궁극적으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깨달음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죄 교리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사람이 교만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대상 앞에 선다면 그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가 잘난 것만 보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돌아서는 것이 바로 회개이고, 그런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시시비비 논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 절대적인 대상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어떤 영적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럴 때 세상과 자기의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제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원했던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뽕나무를 바다로 빠지게 할 수 있는 겨자씨 믿음의 차원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영적 사태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가장 간단한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앞에서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최선을 다한 자기의 수고를 인정받지 못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뭔가 섭섭한 생각이 들거나 뭔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겁니다. 거꾸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는 생각이 든다면 믿음의 깊이로 들어간 것입니다. 후자로 살고 싶으나 보통은 전자에 해당할 겁니다. 설교하는 저도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믿는 예수께서 삶의 나락인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믿음의 세계로 조금씩이라도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사람들의 시선과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바울 버전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