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믿음의 정체 (눅 18:1-8)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0. 22. 06:19

 창조절 7, 2025년 10월 19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

 

예수께서는 비유로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비유나 은유가 아니면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남자 재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 과부입니다. 재판장은 갑 중의 갑이고, 과부는 을 중의 을입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재판장은 서오남’(서울대 오십 대 남자)이고, 과부는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자 노동자입니다. 재판장을 본문이 이렇게 표현합니다.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라고 말입니다. 안하무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의 인격이 다른 이들보다 유독 삐뚤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고위층이 되면 저절로 저런 삶이 몸에 뱁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어느 날 과부가 재판장에게 왔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과부가 어떤 이와의 실랑이에 연루된 거 같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모릅니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과부가 아주 딱한 형편에 놓였다는 사실만 여기서는 중요합니다. 그녀가 말하는 원수가 실제로 자기를 억울하게 하는 주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 구실 못하는 외아들일지도 모르고, 삶의 권태나 허무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할 처지가 아니라서 여러 가지로 바쁜 재판장에게 온 겁니다. 재판장은 처음에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더 큰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할 사람입니다. 과부의 개인적인 일은 재판장으로서의 스펙 쌓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일상도 상당히 바빴을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재판장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4-5절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이어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시고 이어서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원한을 풀어 준다는 표현이 강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원수 갚아주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강청 기도를 드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합니다. 원한을 풀어 준다는 헬라어는 κδικήσω(에크디케소)인데, 본문에서 변형된 단어로 네 번(3, 5, 7, 8)이나 나옵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에크디케소는 정의(justice)를 세우거나 앙갚음한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부르짖는 사람

 

여기서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됩니다. 하나는 밤낮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밤낮 부르짖는다는 말은 오직 그것 하나에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시어(詩語)를 찾으려고 밤을 새우고, 배고픈 아이가 밤낮 엄마를 보채듯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승 불교 용어로 화두를 붙드는 겁니다.  15장에는 잃었다가 다시 찾는 기쁨을 주제로 세 편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어떤 여자,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그들은 오직 다시 찾아야 한다는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을 때마다 저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런 열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신앙인지 모릅니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에 머물러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요한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3:16)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고 있나요? 그분을 실제로 더 깊이 알고 싶은가요? 여러분은 생명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으신가요? 세상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궁금해서 밤낮 부르짖고 있나요? 우리는 매일 일상을 성실하게 삽니다. 그런 삶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행을 다니고 좋은 물건을 사고 취미생활도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이 조금씩 풍성해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똑같은 즐거움의 반복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칫 일상 과잉에 떨어짐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잠들거나 질식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과부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주일 공동예배를 비롯한 금요 철야 집회와 새벽 기도회와 산상 집회 등등을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이 바로 부르짖는 사람이 되는 길일까요? 그건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샘 기도가 반드시 부르짖는 기도는 아닙니다. 영혼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듯한 영혼으로 사는 겁니다. 이런 영혼이 무엇인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좋은 직장과 괜찮은 집을 달라고 매달릴 수 있겠지요.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라면 건강을 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겠지요. 전쟁 중인 나라 사람들은 전쟁 종식과 평화를 달라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다 좋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해결되면 더는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들입니다.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뤄져도 여전히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부르짖음이야말로 궁극적인 부르짖음입니다. 그 세계는 곧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의 조건만 찾으면서 사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택하신 자들

 

다른 하나는 7절이 가리키듯이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을 뿐 아니라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자들은 마치 목자와 양의 관계와 같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일일이 다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듣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느끼고 압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관계의 깊이를 모른 채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르는 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아는 거보다는 모르는 게 훨씬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언감생심이라고, 우리 앞에는 모르는 것 천지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기가 근원에 관해서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첫걸음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학문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 전체의 원리를 가장 잘 안다는 물리학도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모릅니다. 거꾸로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를 모릅니다. 태양 빛이 왜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지를 모릅니다. 양자의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입자이면서 파동입니다. 모든 것들은 확률로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인과율 원리보다는 우연성이 이 세계를 끌어가는 더 근원적인 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근원에서는 비밀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헤어지는 일도 딱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우연한 일들이 겹치고 쳐서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몽골 초원을 스친 바람(공기)이 신비롭게도 제가 사는 원당 마을을 찾아옵니다. 오늘 밤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우리집 마당에 착륙한다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자기가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비밀의 궁극적인 근원이 곧 성경이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입니다. (Eberhard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참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밖에 없고, 그 깊어지는 사태가 바로 본문이 말하는 택하신 자들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동시에 부르짖듯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문장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원한을 풀어 준다는 말은 올바른 판결을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과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만이 모든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해결되면 다른 문제도 다 저절로 해결되는 겁니다. 안 그런가요?

 

여기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이좋게도 지내지만 싸우기도 합니다. 울기도 합니다. 화를 냅니다. 분해서 못 견디는 아이도 있을 겁니다. 어머니가 부릅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아이는 친구들과 싸우면서 겪었던 감정이 일시에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 외의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느냐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걸 경험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위의 비유에 나오는 어머니의 음성이라고 믿습니다. 어부로 살던 사람을 불러서 제자로 삼았고, 세리로 살던 사람을 불러서 제자로 삼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사이비 교주처럼 우리를 이용하려고 부르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평화이고 자유이며, 쉼이고 안식입니다. 삶을 실제로 풍요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3:20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며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믿음의 세계

 

어떤 분들은 이런 경험이 신앙의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못 삽니다. 여러분과 비슷하게 세상에서 일희일비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인생살이에서 모든 문제가 이미 다 해결된 것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이미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는 세상에서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을 다 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정체>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본문 마지막 단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는 종말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이를 예수께서 재림하는 때라고 말합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카이로스)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간과 순간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미 여기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로 시간과 순간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설적으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은 <믿음의 정체>를 붙들라는 강력한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뽕나무를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정체를 분명하게 붙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방법이 있을까요?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뾰족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방법이 아니라 관점과 방향만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이 비유의 목적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도는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경건 의식입니다. 관점이 자기에게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와 자아에 매몰되어서 삽니다. 일분일초도 자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예민합니다.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숨을 쉬듯이 자기를 벗어나서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니까요.

 

그렇게 살아도 종종 낙심할 만한 일들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가족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사고도 나고 배신도 당하고 사업에 실패도 겪습니다. 기도의 내용대로 삶이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도한다.’라는 말과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할 때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자기에게 조그만 일이 일어나도 천지가 무너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낙심할 만한 일로 가득합니다.

 

이 두 가지, 즉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삶을 수행의 차원에서 끌어나간다는 뜻입니다. 전문적으로 삶을 수행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출가 수도승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영혼이 풍성해지는 경험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출가 수도승으로 살지는 못하나 최소한 재가 수도승으로서의 정체는 유지해야 합니다. 일상을 멈추고 함께하는 예배 순간도 이런 수행입니다. 가을수련회 참가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신학책을 읽고, 진정성 있게 사회봉사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길을 수행의 차원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놀라운 믿음, 즉 원한이 제대로 풀리는 세계로 시나브로, 또는 눈이 확 뜨일 정도로 갑자기 들어갈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