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9주, 2025년 11월 2일
행 17장에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마게도냐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오른편 가까이에 빌립보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바로 앞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상당한 결실을 얻었으나 군중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론 자격증도 있던 사람이라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풀이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17:4절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서도 전도의 결실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곳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거나 “가이사의 명을 거역했다.”라고 군중을 선동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간 세월이 지난 뒤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활발하게 이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그곳에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 관한 자기의 생각을 전하려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당시 그 편지를 쓸 때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지가 상상이 갑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살전 1:1, 살후 1:1)라고 할 때 교회는 지금처럼 조직된 교회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때가 50-52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있은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 지도자답게 회당에서 설교하고 전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 공동체는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볼 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클레시아)는 미래가 불투명한, 아주 어린 모종과 같았습니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믿음이 자라는 게 기특하기는 하나 자칫 열광주의 신앙에 떨어질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랑스러운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서 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헬-Χάρις, 라-Gratia)와 평강(헬-εἰρήνη, 라-Pax)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화는 의례적인 인사 문구입니다. 바울 편지의 서두에는 이런 표현이 늘 들어갑니다. 일반 로마와 그리스 지성인들이 글을 쓸 때도 이런 단어를 종종 사용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은혜와 평화를 원하니까요.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화는 아주 특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입니다. 1절에서도 중복해서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똑같은 단어라도 어떤 뜻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행복을 원하고 그리스도인들도 행복을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세운 인생 계획이 달성되는 데서 행복을 느끼겠으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은혜의 깊이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은혜는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의 깊이로 들어갔다면 그는 자기 삶을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니니까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인 한 사람은 하루에 2만-2만 5천 번을 호흡합니다. 그걸 양으로 계산하면 8천-1만 리터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양입니다. 만약 공기를 돈으로 사야 한다면 숨쉬기조차 힘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부자라고 해서 숨을 더 많이 쉬는 것도 아닙니다. 과호흡은 위험합니다. 모두 똑같은 분량만큼 숨을 쉽니다. 모든 것이 자연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절감하는 사람이 있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외에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것들은 모두 선물입니다.
지난 다샘교회 수련회 둘째 날에 함께 부른 CCM의 제목은 <은혜>(손경민 작사 작곡)입니다. 1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찢어지게 가난한 삶도 은혜라는 말이냐고요. 장애나 지병도 은혜라는 말이냐고요. 그 외에도 실제로 고통스럽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배신당한 사람은 은혜를 생각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면 얼마든지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망설여집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립니다. 각자의 어려움은 일단 각자가 짐 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바꿔나가는 일도 필요합니다. 나라가 무조건 더 잘 살기보다는 빈부 차이를 줄이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얼마 전 설문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배보다는 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기에 끊임없이 서로 힘을 모아서 전향적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고통 가운데 떨어진 사람들에게조차 은혜가 완전히 막혀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렵기는 하나 고통 가운데서 경험하는 은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은혜라고 저는 기독교 역사에서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믿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팔복> 말씀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으며,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죄가 없는데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유와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십자가 처형과 같은 삶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도 인생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빛으로 경험한다면 그는 분명히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의 역설이자 신비입니다. 그 지경까지 우리가 나아가야만 언젠가 닥칠 개인의 죽음까지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작 문제는 극단적인 고통과 가난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괜찮은 형편에서도 삶을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때에 따라서 아귀다툼 식으로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하나로 묶으면 자기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쏟아낸 불평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틀린 말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심리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큰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은혜로 여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큰아들은 정말 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도 그걸 은혜로 느낄 줄 모르니까 불행한 인생입니다.
평화의 능력
은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영혼에 나타나는 영적 현상은 ‘평화’입니다. 은혜의 결실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은혜와 평화를 한 묶음으로 표현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는 선물로 경험하니까 그의 영혼이 평화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의 모든 병의 원인은 평화로운 영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영혼이 평화롭다면 빈부격차를 가속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하는 부동산 투기에 마음이 갈 이유가 없습니다. 평화로운 영혼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대할 수 없고, 성 소수자들을 배척할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서 분단된 이후 80년 동안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남북한은 휴전 상태이지 종전을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우리의 분단 체제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도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지구에 사는 전체 인류의 삶이 왜 이렇게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일까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편지를 쓰던 당시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부터 200년 이어진 <Pax Ramana>(로마의 평화) 시절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로마가 완벽하게 지배하면서 평화를 실현했다고 여기던 시절입니다.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평화는 강요된 것입니다. 주변 식민지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채찍으로 찍어 누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근으로 달랩니다. 지금 미국이 그런 식이고, 말기 자본주의가 그런 식입니다. 이번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모임에서도 결국에는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수출 관세를 낮추려고 미국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2000년 전후에 체결된 국가 간의 자유무역협정이 미국에 의해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트럼프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행태는 거칠게 표현해서 ‘삥’ 뜯는 조폭의 그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처럼 2천 년 전 로마 제국에 의해 강요된 평화는 위선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나>(Pax Christiana)를 외쳤습니다. 평화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교회가 선포한 그리스도의 평화를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시민권(요즘의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게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는 물론이고 로마 장군이나 귀족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생명 나라인 하늘나라에서 아들과 딸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은혜와 평화를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말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영광의 미래
은혜와 평화가 우리의 삶에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자주 불안해하고 언짢아합니다. 완성은 미래의 일입니다. 은혜와 평화의 완성을 가리켜서 본문은 영광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살전 1:10절에서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 ”라고 썼습니다. 은혜와 평화가 충만해지는 순간이 바로 예수의 다시 오심이고, 성령의 임하심이며, 영광의 빛이 드러남입니다. 12절에서 이를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서 썼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의 오심과 가르침과 능력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약속으로 이어지는 그의 운명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구성원들인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정말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바라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부수적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부자로 살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까? 여기서 핵심은 예수의 운명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의 운명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운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와 똑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뚫어보고,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게 됩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집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과 같이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에 아이들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이 가난한지 부자인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상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이런 영적인 경험을 가리켜서 바울은 영광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영광의 삶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 예를 들면 스데반입니다. 그는 순교 장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행 7:56) 보았다고 합니다.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빛과 소리로 경험했고요. 예수와 온전히 하나 되는 경험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신화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신화적인 보도라고 해서 헛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경험에는 아주 분명한 삶의 실체(reality of life)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영광이나 빛이라는 메타포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생명의 실체는 오늘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인사말로 전한 “은혜와 평화”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신앙인들과 달리 세상살이에 늘 휘둘리면서 사는 평범한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저는 모릅니다. 한 가지만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저는 방향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은폐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를 쉬지 말고 기도하듯이 찾아보십시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요. 영혼의 눈을 감지만 않는다면 밭에 묻힌 보물을 찾은 어떤 사람처럼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것이며, 삶을 기뻐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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