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눅 20:27-38)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1. 13. 06:02

 창조절 10, 2025년 11월 9

 

 

제가 사는 원당은 다른 농어촌과 마찬가지로 주민들 전체 숫자가 이십여 명뿐인 데다가 그나마 귀촌한 몇 가정을 빼면 나이가 죽음에 가까운 80-90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작년부터 노인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영감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마을 방송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늙은이들만이 아니라 병이나 사고로 죽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대로부터 지혜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로마 시대에 개선장군이 시가행진할 때 목청 좋은 노예 한 사람이 바로 뒤를 따르면서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쳤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이 교만해지려는 걸 경계하는 관습입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그걸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몇 가지 죽음 현상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심장과 숨이 멈추고, 뇌파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리적 파멸로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끝장인가, 하는 점에서는 왈가왈부 다른 의견이 충돌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는 주장이 대세입니다. 인간의 몸은 죽음을 통해서 지구의 원소로 해체되는 게 물리적으로도 분명하니까요. 인간의 영혼은 몸과 달리 소멸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영혼 불멸설이 그것입니다. 영혼은 단순히 뇌의 작용에 불과한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생물학자도 있습니다. 약간 다른 방향에서 불교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죽은 자의 삶

 

오늘 설교 본문이 바로 그런 주제를 다룹니다. 사두개인 몇 사람이 예수께 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려고 모세의 율법을 들고 옵니다.  25:5절 이하에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제도가 나옵니다. 결혼한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제도입니다. 오늘 관점으로 보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보편타당한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유대교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실행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결혼했고, 자식 없이 죽었다면 훗날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진정성이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을 곤란한 처지에 빠뜨리는 올무입니다.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곱 형제 중에서 한 사람에게만 이 여자의 남편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까요.

 

34절부터 예수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짚었습니다. 부활의 세계에는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결혼은 하나의 제도입니다. 제도는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지금은 거의 일부일처제가 자리를 잡았으나 이전에는 일부다처제가 있었고, 거꾸로 일처다부제도 실행되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어떤 오지에는 그런 제도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소수자들이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합니다. 부활의 세계에 결혼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이 없다는 말은 부활의 세계가 지금 우리의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질적으로 다르듯이 말입니다. 이런 사태를 36절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부활의 자녀라는 표현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이 연결되었습니다. 이 대목을 <독일성서공회 해설>을 싣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이 이렇게 해설을 달았습니다.부활의 삶은 하나님의 원초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가장 밀접한 교제를 실현시킨다.( 8:11, 29-30 참조)” 여기서 자녀라는 표현은 일종의 문학적인 메타포입니다. 부활이 어떻게 실제적인 자녀를 두겠으며, 하나님께 어떻게 실제적인 자녀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원초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 생명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원초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원초적이라는 형용사와 반대되는 형용사는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생명이 바로 원초적인 생명과 반대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등입니다. 의료 기술로 수명이 늘어나는 현상도 인위적인 것입니다. 원초적 생명은 사람이 손을 대지 못하는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게 무엇인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숨쉬기, 먹기, 배설하기, 걷기, 듣기, 보기, 말하기 등등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것들은 모두 원초적이면서 시원적인 생명입니다. 무엇을 본다는 현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똑같이 길을 가면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사람이 있고, 건성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실감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의 깊이를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시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삶의 깊이를 보고, 못 듣는 깊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듣습니다. 2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낭독됩니다. 그 성경 텍스트의 깊이에 은폐된 진리가 설교로 선포됩니다.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예배 사건은 원초적이면서 시원적인 생명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에 매달리듯이 인위적인 생명에만 매료되기에 예배 영성을 외면합니다.

 

원초적 생명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거기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거룩한 힘에 압도당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초월하는 사람은 인위적인 제도와 문명에서 받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돈이나 권력이 주는 자유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느끼는 만족감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말 그대로 영혼의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의 절정을 부활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본문이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경험으로 살기를, 이런 경험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바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두개인처럼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삶의 형식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것에 묶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받아야 하고, 업적을 쌓아야 하고, 돈도 더 벌어야 합니다. 이런 거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얼마 전 서울시 의회가 밤 10시까지만 허용되던 중고등학생들의 학원 수업을 밤 12시까지 늘리는 안건을 올렸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아침부터 자정까지 교실에 묶어두는 나라가 우리나라 외에 또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학대도 이런 심한 학대가 없습니다. 제가 독일에 잠시 있을 때 경험한 바로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도 오후 3시 정도면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최소한 청소년 학생들이 저녁밥은 집에 돌아와서 먹게 하는 게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는 날이 갈수록 더 극단적으로 인위적인 생명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그걸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활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삶이 겉으로는 활력 넘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의 삶이 아닐까요?

 

살아 있는 자의 삶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삶은 무엇일까요? 결국 죽게 될 인간에게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예수께서는 출 3:6절을 인용하면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하신 뒤에 38절에서 그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

 

알 듯 말 듯한 문장입니다. 관념적이라서 모호하게 들리긴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죽어도 살아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직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도 죽는 게 분명하니까요. 비그리스도인들도 인생을 멋지게 잘살고 있으니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10년과 20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30년과 4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청년들의 20년과 40년 후는 이미 코앞에 당도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 묶여 있기에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일상에서 건강하고 윤택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서로 연대하고 돕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쏜살같이 다 지나갑니다. 많은 이들이 그 모든 것의 허무를 직관적으로 알기에 거기에 더 매달리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습니다. 그런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게 바람직하다거나 살아 있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으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살아 있지 못한 겁니다. 살아 있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세상 사람들처럼 일상에 과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일상에 성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상 자체가 아니라 그 일상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일상 자체는 우리를 살리기도 하나 파괴하기도 합니다. 일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궁핍해도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명 충만감이 여러분의 영혼을 채우고 있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본래 어려운 겁니다. 어려운 데도 쉬운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와 예배 출석과 각종 헌금 등등, 이런 종교 행위만을 가르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탁월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은 뜨거웠으나 하나님 경험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영혼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모범적인 교인으로 인정받기는 하나 그 내면에는 하나님 경험이 미숙한 사람과 같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수준이니까 수학 개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로 근근이 신앙생활을 연명할 뿐입니다. 이런 분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분들이 예배 시간에 바치는 Kyrie eleison Miserere nobis(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만은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살아 있는 자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아마추어에 머물지 말고 프로페셔널이 되도록 깨어서 기도하듯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삶이 무엇인지를 계속 질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은폐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종말론적 약속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영혼 깊이 새겨야 합니다. 먹고 살기가 바빠서 하나님에 관해서 질문하기도 어렵고 답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요.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을 조금만 줄인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영혼의 근력을 키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몸의 근력을 키우려고 시간을 아껴가면서 헬쓰장에 다니거나 PT를 받듯이 노력해야겠지요.

 

우리는 오늘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가 누군지를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말씀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죽음 너머서까지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고 믿기는 더더욱 힘들다고요? 지나치게 경제 논리나 자연과학 실증주의 같은 이 세상의 논리에 기울어진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경제 지표나 지능 수준이나 의료 수준 등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살아 있음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적인 생각과 믿음을 뭔가 논리적으로 허술하다거나 종교적인 편향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삶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이 우리 잘살고 있어. 행복해.’하면서 내세우는 자랑거리들이 실제로는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에 관한 오늘 말씀을 요한복음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11:25,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를 살아 있는 자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죽음까지 극복되는 살아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관심을, 그의 운명을 여러분의 영혼에 가득 채워보십시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완전히 새로워질 것입니다. 바울 표현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는 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