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하나님의 충만과 평화(골 1:11-20)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1. 27. 06:28

창조절 12(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2025년 11월 23

 

 

그리스도 송영

 

저는 아쉽게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오늘날의 튀르키예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동편으로 시리아와의 국경에 근접해 있는 안디옥과 서편으로 지중해에 면한 에베소에 가면 바울의 초기 전도 여정에 대한 느낌이 색다를 거 같습니다.  19장의 보도에서 보듯이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초반부에서 중요한 지역은 에베소입니다. 거기서 3시 방향 160킬로미터 지점에 골로새가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이며 제자라 할 에바브라가 세웠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 교회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이단 사상이 발호한다는 소식이 그것입니다. 그 상황을 골 2:8절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이런 이단 사상의 내용이 골 2:11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할례 주의자들과 유대교 절기를 고수하는 이들과 금욕주의자들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혼합주의(syncretism) 신앙을 가리킵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엄격하게 금지한 바알숭배가 대표적인 혼합주의입니다. 선지자들은 혼합주의가 유대인들의 영혼을 손상한다고 보았습니다. <십계명> 둘째 항목도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20:4, 5)

혼합주의 신앙은 가짜 보석과 비슷합니다. 일단 겉으로 빛을 내기에 비슷해 보일 뿐이지 진짜는 아닙니다.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석 감별사가 진품 보석을 계속 붙들고, 위조지폐 감별사 역시 진품 지폐를 계속 붙들고 살듯이 혼합주의 신앙과 참된 신앙을 구분하려면 참된 신앙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삶의 본질을 알아야만 삶의 허상이 눈에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 1:15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확실한 분은 아닙니다. 바람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는 없으나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εκν το Θεοῦ)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쓰는 단어인 아이콘이 바로 이 그리스어 에이콘에서 왔습니다. 에이콘은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만 가능한 일들이 예수에게 발생했기 때문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헨델을 서양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거와 비슷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에이콘이기에 하나님처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입니다. 모든 창조의 근원입니다. 찬송가 가사를 듣는다는 느낌으로 16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 대목(15-20)은 실제로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불리던 그리스도 송영이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께만 어울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과 똑같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와 똑같이 어머니 뱃속에서 40주 정도 자라다가 세상에 나와 보통 유대인 남자로 살았던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말인가요? 조금 더 실제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라 할 예수가 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을까요? 폭력적인 로마 제국과 위선적인 유대교를 힘 안 들이고 말 한마디로 제어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이미 마태복음도( 26:53)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

 

다음과 같은 비유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할지요. 지금 지구에는 잘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들도 많고 인기 있는 연예인도 많습니다. 대통령도 있고, 교황도 있고, 인공지능 엔지니어와 기업가들도 많습니다. 생존해 있는 노벨 수상자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들은 16절에서 언급된 왕권이고 통치자이며 권력자들입니다. 그런데요. 내일부터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권력과 명예는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 세상의 그 잘난 권력과 왕권과 미모와 자랑거리는 태양이 뜬다는 사실이 전제될 때만 겨우 유지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의 토대가 실제로는 아주 부실한 겁니다. 이와 달리 예수는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똑같은 생명의 근원으로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송영을 부르는 중입니다. 그 송영은 19절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충만(πλήρωμα)은 하나님의 본질이고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곧 생명 충만입니다.  2:9절에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1:23절에도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예수에게 임한 하나님의 충만은 무엇일까요? 그걸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살이가 충만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먼저 뚫어봐야 합니다. 충만이 아니라 온갖 결핍에 시달립니다. 인정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불평불만이 사람들의 내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불안 장애도 많이 나타납니다. 돈에 대한 욕망은 무한정입니다. 2001년도 영화 <친구>에 나오는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대사는 단지 조폭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말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 대한민국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정치계부터 시작해서 교육과 노동 현장까지 우리는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딸을 판 돈으로 음식을 사 먹어도 해결되지 않자 급기야 자기 몸을 뜯어먹는다는 그리스 신화 <에릭시톤> 이야기를 현실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결핍 증후군으로 인해서 평범한 일상마저 온전하게 버티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관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인간은 본래 그런 거니까, 그런 현상을 너무 나쁘게 보지 말라고 말입니다. 소유를 늘리고, 남에게서 인정받고, 배부르며, 재미있게 살려는 의지와 욕망은 인간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 왜 결핍 증후군으로 보느냐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이들은 내면의 충만이나 영혼의 충만이 밥 먹여주냐고 희화화합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일용할 양식만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려는 출가 수도승들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런 여러 가지 욕망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치우치다 보니 거기에 완전히 길들어 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매일 통속적인 드라마에만 길든 사람은 박경리와 한강과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작품에 마음이 가지 않고, 따라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

많은 이들이 이런 영혼의 결핍을 해결하려고, 또는 채우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합니다. 가장 전통적으로는 템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겁니다. 요가나 명상 수련원에 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숲을 찾습니다. 귀농인이 되기도 하고, 제주도 한 달 살기도 합니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악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영혼의 결핍을 치유하는 소소한 퍼포먼스는 우리 주변에 널렸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나름 생명 충만을 경험하려는 겁니다. 일종의 자연과 예술과 문학을 통한 유사 종교 경험입니다. 꾸준한 운동을 통해서 몸이 건강해지듯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 내면도 분명히 부분적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회 얻는 대로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토대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충만은 이런 유사 종교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특별한 실존 인물에게서 벌어진 유일무이한 어떤 사건에 대한 고유한 경험입니다. 예수는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의 토대라고 바울이 묘사할 정도로 아주 특별한 경험에서 오는 충만입니다. 바울은 그 충만을 20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바울이 말하는 충만은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으로 죄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와 죽음은 생명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충만하게 살지 못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었다는 말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당시 골고다 언덕에서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통해서 평화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었다고 해서 로마 제국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보면 아주 불행한 분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으며, 자기 이름으로 된 집도 없었고, 돈도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8:20)는 예수의 토로는 그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런 실존의 끝자락인 십자가 죽음이 생명과의 평화를 실현했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요?

예수 십자가 사건을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의 거룩한 열망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제자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걸 뜯어말렸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 운명을 맡긴 채 십자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잘한 선택이었을까요, 종교적 열광주의자의 만용이었을까요? 요한복음은 그를 가리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라고( 1:29) 말했습니다. 희생제물로 제단에 올려진 어린 양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영혼의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요?

로마 제국과 같은 거악 앞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워야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각 나라의 군비 경쟁이 끝나지 않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핵잠수함을 만들고 싶어서 미국의 승인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폭력적인 세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악을 똑같이 악으로 제압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이게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명백합니다. 악과 폭력의 대표 격인 죽음과 싸우려고 한다면 백전백패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그 세력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때 실현됩니다.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 말고, 생명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겁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18:36)라는 말을 분명하게 반복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시 악과 폭력의 상징인 로마 제국의 폭력적인 욕망에 자기 운명을 던진 결과로 빚어진 비극입니다. 로마 제국은 예수를 아주 간단히 처리해 버렸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과 생명의 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십자가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제자들에게 분명해지자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의 영혼에서 궁극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더는 세상과 똑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영혼의 평화와 자유를 얻은 겁니다. 이들에게는 만물과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10대 시절 집안 형편으로 서울에서 경주로 내려가 3년 동안 경주 상고를 다녔습니다. 우리 반에 깡패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일진인가 봅니다. 저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친하게 잘 지냈습니다. 이런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어도, 세상의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으면 악의 기세는 활개를 치지 못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예컨대 가난도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만약 가난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힘을 합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복지 제도를 조금씩 넓혀간다면 말기 자본주의는 더 이상 난폭하게 굴지 못할 겁니다. 아무도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데 누가 부자가 되려고 기를 쓰겠습니까. 이런 태도는 너무 소극적인가요? 세상이 얼마나 난폭한지 전혀 모르는 사람의 비현실적인 몽상일까요?

 

바울의 심정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 충만감을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의 평화가 더 풍성해졌습니까? 그래서 만물과 화해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중입니까? 이런 질문을 외면하지 말고 화두로 붙드십시오. 그래야만 골로새 교회에 스며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세련된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혼합주의 신앙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