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오시는 하나님 (사 35:1-10)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2. 21. 07:06

대림절 3, 2025년 12월 14

 

 

이사야의 신탁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 안간힘으로 저항하다가 기원전 721년에 정복당했습니다. 남유대는 조공을 바치는 수준에서 패망만은 면했으나 속국 신세로 떨어졌습니다. 조금 세월이 흘러 기원전 587년에 남유대는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사 35:1-10절의 글쓴이로 알려진 제1 이사야는 기원전 736-701년 사이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폭력 앞에서 유대가 포함된 근동 지역 사람들이 벌벌 떨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본문 중에서 1-2절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이렇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겉으로 표현된 것만 보면 감미로운 인생 예찬 시()처럼 들립니다. 현실은 반대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나 우크라이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에 백합화가 피어서 기쁜 노래로 즐거워할 것이라고 외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쟁의 폐허 가운데서도 백합화는 피고 장미꽃도 피며 여전히 농사짓고 양을 키우겠으나, 그곳 민중의 삶은 총체적으로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할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현실에 맞지 않는 신탁을 외치는 이유는 당시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라서 이런 방식으로라도 민중을 위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런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여호와의 영광을 볼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실제로 믿었던 것일까요?

문학적인 성격이 강한 1-2절과 달리 3-4절은 현실적으로 들리는 내용입니다. 4절만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손과 무릎에 힘이 풀렸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용기를 내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용이 아주 노골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으러 오신다고 말입니다. 오셔서 보복하시고 유대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다느니 보복한다는 표현은 조폭 세계에나 어울립니다. 그런 표현은 묵시문학 장르에 속한 표현이라는 걸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즉 원수를 갚는다거나 보복한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뼛속 깊은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깊이 이해하시고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재

 

이 대목에서 핵심은 하나님께서 오신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을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학생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직장인이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합니다. 결혼해서 먼 지역으로 떠났던 자식들이 부모를 만나서 옵니다. 하나님은 어디로 온다거나 간다고 말해도 좋은 분이 아닙니다. 지구 표면에 공기가 없는 곳이 없듯이 하나님은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편재하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표현은 훨씬 근원적인 어떤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에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었습니다. 제국이 작은 나라를 무력으로 짓밟았습니다. 제국의 횡포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민족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우상숭배는 일상적이었습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은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3:10)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2:2)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7:3) “(심지어)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3:4)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5:5) 이런 구절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삶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선지자들이 짚은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호와를 찾으라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다그쳤습니다.

 

오늘 21세기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 못지않게 하나님의 부재라는 특징이 분명합니다. 그걸 뚫어볼 줄 아는 사람이 오늘의 선지자이겠지요. 예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 19:41)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부재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가 봅니다. 특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롭게 사는 21세기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그 풍요로 인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지 모릅니다. 도시마다 높은 건물이 들어서고, 대형마트마다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스마트폰 하나로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배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상실감과 무력감과 결핍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자도생 논리는 더 심해집니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입시지옥이 여전합니다. 영혼의 풍요가 아니라 영혼의 빈곤에 떨어지는 게 곧 하나님의 부재 현상입니다.

 

오늘의 SNS 문화가 젊은이들의 정신을 더 빈곤하게 하거나 거꾸로 과부하에 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 호주에서는 16세 이하는 SNS 가입을 못하도록 입법화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너무 촘촘하게 연결되는 SNS로 인해서 일반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정서가 아직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어린이들의 정신 건강이 위태로워졌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강박과 조울증 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강박과 조울증 현상에 현란한 리듬의 노래와 춤, 그리고 영화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K-문화가 상당할 정도로 일조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엔터테인먼트에 루틴으로 정신을 파는 동안만큼은 자신의 정신적 결핍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재와 상관이 없을까요? 십자가 첨탑과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교회당과 열정적인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각종 종교 이벤트가 열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재가 가려지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발생해야 할 영적 갱신과 풍요와 대림절의 기쁨이 실제로 교회와 교인들에게 어느 정도로 충만하냐가 관건입니다. 오래전 이 문제를 도스토옙스키가 짚었습니다.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오는 한 단락이 대심문관입니다. 재림한 예수는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다가 세상을 소란하게 한다는 죄명으로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을 똑같이 주장합니다. 1) 민중은 영혼의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 2) 초자연적인 기적을 원한다. 3) 민중은 교회를 숭배하고 싶어 한다. 이 세 가지를 당시 러시아 정교회가 잘 감당하고 있으니까, 예수는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고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가 되겠다는 겁니다. 빈부격차가 세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대한민국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걸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 경험

 

하나님의 부재라는 말은 사실 성립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그분은 없는 곳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신탁은 하나님께 영혼의 촉수를 맞추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5절부터 그 내용이 나옵니다.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들은 사슴처럼 뛰게 될 것이고 언어 장애인들은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께서 마 11:5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본 것을 그대로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오셔서 일어나게 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사야의 거룩한 상상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을 옮겨놓은 듯한 이사야의 이런 구원 신탁이 유대 역사에서 실제로 구현되었을까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고대 유대의 역사는 점점 더 몰락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은 완전하게 새로워졌을까요? 장애인들이 고침을 받고,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알게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도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불의합니다. 장애인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삽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 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공동번역,  35:10)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이사야의 신탁은 틀린 건가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관점은 이사야의 신탁이 우리 삶에서 현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주술적이거나 초자연적인 힘으로 세상을 억지로 바꾸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일어나게 될 일을 우리가 감당하도록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최소한 삶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복지 제도를 래디칼하게 바꿔가야겠지요. 예를 들어서 기본소득 제도를 실행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월 오십만 원의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생존의 위기는 넘길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몇 군데서 실험 중이라고 합니다. 반대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걸 감당할 만한 돈이 어디 있느냐고, 기본소득을 주면 일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지혜를 모아서 이런 일들을 견인하라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아서 세금으로 연봉을 많이 주는 거 아닙니까.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이게 사실 핵심인데, 우리의 생각만 바꾸면 이사야의 신탁은 이미 일상에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눈과 귀의 문제입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반드시 생리적인 시력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비싼 안경을 쓰고, 백내장 수술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영적인 안목이 밝아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너무 잘 보이고, 아는 게 너무 많아져서 영적 안목이 오히려 더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재미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영혼에 관한 일들이 심드렁해지는 거와 같습니다. 추운 겨울철 밤하늘의 별을 자세하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와 똑같이 삶의 애환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혼의 시각장애입니다. 귀가 열린다는 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예수께서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9)고 하셨으니까요.

 

질적인 변화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라는 7절도 이미 여기서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즉 하나님을 경험하면 사막처럼 건조했던 우리 영혼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해집니다. 메마른 땅 같았던 우리의 영혼이 많은 식물과 동물이 자랄 수 있는 땅으로 변하는 겁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삶이 꼭 하나님 경험만으로 가능하냐고, 예수 믿지 않아도 고급스러운 성품과 인격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들이 실제로 고상하고 우아한 성품과 인격으로 사는지, 그냥 흉내만 내는지는 제쳐두고, 이런 문제로 서로 다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휴머니즘과 자연주의 영성으로 살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사야가 외치는 하나님의 오심에서만, 즉 하나님을 향할 때만, 그리고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때로 자기에게나 주변 환경에서 실망할 만한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수행자처럼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의 주인으로, 임마누엘로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믿으며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도스토옙스키의 편지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은 마틴 루터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예수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하며 동정심 있고 이성적이며 인간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또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가 진실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그리고 그 진실이 참으로 예수 밖에 놓여 있다면, 그래도 나는 진실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남는 쪽을 차라리 택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에 함께 예배하는 교우 여러분, 이사야가 외친 오시는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세상 마지막 때, 그리고 우리 개인의 마지막 때 생명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분은 이미 여기에, 우리 안에, 우리의 일상에, 인류 역사에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서 친구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