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예수의 이름 ‘임마누엘’(마 1:18-25)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2. 30. 05:15

대림절 4, 2025년 12월 21

 

 

마리아의 임신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관점에서 전하고 마태복음은 남편 요셉의 관점에서 전합니다. 각각 삶의 자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두 사람이 약혼했으나 아직 동거하기 전인데도 여자가 임신했다는 문장만 읽으면 당시에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가 헷갈립니다. 상식적으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이 공개적으로 동거를 시작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잠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가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입니다. 당시 대다수 사람과 마찬가지로 요셉 역시 난감했을 겁니다. 그는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겠지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됨됨이가 못되었거나 성질이 괴팍한 사람이었다면 마리아와 그 집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을지 모릅니다. 금품을 뜯어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이 스캔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만 끊을 생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여기고 이후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되니까요.

대충 이런 정도로 마리아의 이상한 임신 사건이 정리되어도 좋으나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꿈을 꿉니다. 꿈에 주의 사자’(ἄγγελος Κυρίου)가 나타납니다. 천사가 나타난 겁니다. 공교롭게도 구약에서 꿈을 꾸거나 해몽하는 일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벼락출세한 요셉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이름이 같습니다. 천사의 말이 20절부터 길게 이어집니다. 약혼녀 마리아와의 결혼을 망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임신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에서 본다면 모든 임신은 성령 사건입니다.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놀라운 순간이니 말입니다. 이 말을 요셉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천사는 말을 이어갑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하라고 이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흔합니다.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면 예수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천사는 이름을 하나 더 줍니다. 23절에서 사 7:14절을 인용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이 인용한 이사야의 이 구절이 선포될 당시 남유다의 왕은 12대 아하스였습니다. 그는 다윗과 달리 악한 왕의 본보기였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을 맺어 유다를 침공하자 아하스는 거의 멘탈이 나갈 정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구해낼 사람을 보낼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 말씀을 선포한 겁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표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를 인용한 마태복음도 이런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사도신경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표현에서도 핵심은 동정녀가 아니라 마리아라는 사람 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런 표현이 사도신경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약화하는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영육 이원론이라는 이단 사상을 막아내기 위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고민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뼈대라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의 핵심은 예수의 구체적인 실존과 그 역사성과 일상적 삶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로 구성된 몸으로 살았던 그 예수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에 나오는 임마누엘의 실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짚을 때 대답이 이미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게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은 구원을, 특히 죄에서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서 혹시 실망한 분들이 있으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궁극적인 깊이에서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생살이를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 전통에 여러분은 실제로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대충 그러려니 하고 쉽게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것에 관해서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런 교인들은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튀지 않고 어울려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잘하는 것일까요?

노르웨이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라는 책은 1991년도에 출판되자마자 10년도 안 되어서 전 세계 6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6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손자들이 자라면 읽으라는 뜻으로 말년의 그가 쓴 <너에게 쓴 철학 편지>라는 책이 2023년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거기서 가아더는 열 살 전후 어린 시절의 한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마 일요일 한낮이었을 거야. 나는 갑자기 난생처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고,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았어. 마치 마법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플루트 소리와 유리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어.  모든 게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적처럼 여겨졌고,  깊고 심오한 비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속에 있었던 것이지. (14)

 

어린 가아더는 자기 경험을 또래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어떤 친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른들인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지금처럼 살고 있는 걸까요? 어른들에게서도 대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감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공허했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보다 더 비어 있는 것 같았지. 아마 그들은 나이만 먹고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17)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린 가아더가 말하는 그런 어른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세월은 길지만 신앙과 삶의 근본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이 턱없이 부족한 겁니다. 근본과 근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열정 없이 두루뭉술하게 사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런 질문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전체를 봐야 합니다.

 

예수의 운명

 

마태복음은 2장에서 예수 출생에 관한 이색적인 이야기 한 가지를 보도합니다. 동방에서 온 점성술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찾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헤롯 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정치력이 컸던 유대 지역의 왕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중앙정부도 그의 정치력을 인정했고, 유대인들도 호감을 보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바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은 요셉은 산모 마리아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합니다. 일종의 난민이 된 겁니다. 그들은 헤롯이 죽은 다음에야 돌아와 나사렛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27장에서 삼십여 년이 흐른 뒤 예수의 마지막에 관해서 보도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예수님은 출생 당시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권력자들에게 제거 1순위였던 셈입니다. 갓난아이일 때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으나 삼십 대 초반에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요? 여전히 헤롯 같은 왕과 빌라도 같은 로마 제국의 총독들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세상을 사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그것이 곧 구원 아니냐, 믿음은 단순할수록 좋은 거라고 강변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 충만한 삶에 실제로 가까이 가고 있나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저는 <창작과 비평> 2025년 겨울호에 실린 단편 소설 모르는 사람”(천운영 씀)에 삽화처럼 묘사된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미영은 일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중년 여성들이 줄지어 서서 역 입구를 막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습니다. 광장으로 모여주세요.  차별금지법 폐지에 동참해 주세요. 아이들이 물들고 있습니다. 미영이 살면서 이런 구호를 두 귀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미영의 눈앞에 전단지가 불쑥 나타났다. 사탕과 물티슈가 붙은 교회 전단지.

 

오늘날은 교회가 예수를 통한 구원 공동체라는 사실을 믿고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세상에서 싸구려 잡동사니 사탕이나 물티슈 정도로 취급당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세상에서 반드시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너무 세상을 추종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구원의 정체를 놓친다는 데에 있습니다. 헤롯 왕의 눈치를 보고 로마 총독의 눈치를 봅니다. 시대정신에 주눅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일에만 목소리가 커지는지 모릅니다. 오지랖 넓은 티를 내면서 차별금지법 운운하고, 간첩 운운하고, 중국 혐오를 부추깁니다. 저는 작년에 대대적으로 열린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예루살렘 군중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승리주의 시각으로 듣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성공 신화가 그것입니다. 그런 시각은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왕과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 총독에게나 어울립니다. 예수님은 그런 승리주의 세력에게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까지 경험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무슨 근거로 우리는 예수의 정체와 본질을 임마누엘이라고 믿는 걸까요? 실제로 믿기는 믿나요? 그게 뭔지를 알고 믿나요? 무조건 믿으면 되나요?

 

임박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라는 사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보여주신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메시지로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맞춰집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에만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당시 종교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종교 업적과 율법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민중들의 등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은 겁니다. 그들의 인격이나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저절로 종교 업적과 율법에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본문이 말하는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는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는 삶의 태도입니다. 경주마처럼 시야가 협소하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끼려야 느낄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게 본래 자기를 사랑하는 거 아니냐, 자기를 중심에 두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자기 과시를 그 특징으로 하니까 이런 생각들이 더 힘을 얻는 중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의식하면서 삽니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예배에 와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찬송가 내용이 그의 영혼에서 울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름으로 교양적이면서 초연하게 사는 듯이 보이는 이들도 자기 사랑에서, 더 노골적으로는 자기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혼의 문을 자기라는 빗장으로 닫아놓은 형국입니다. 그런 영혼으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습니다. 여기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이처럼 어머니 품만 의식하지 자기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는 길을 가면서도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습니다. 집중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문을 함께 읽습니다. 기쁨과 평화의 기운이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낍니다. 눈 가리개를 벗듯이 자기애,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니 새롭게 보이는 게 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빠 아버지라는 생각이 그의 영혼에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기에 제자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 경험한 거 아닙니까. 그게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인 부활 신앙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의 은총이 가득 차고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