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대해 언급한 후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당한 고난은 예수님이 당한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죄와 맞서서 싸우다”(4절)라는 말은 유혹과 시험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는 영적 싸움을 가리킨다.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들이 고난 중에 있기는 하지만 순교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잠언 3장 11-12절을 인용 하여, 지금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한다(5-7절). 따라서 유혹과 시험과 박해를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7절).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하는 징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다(8-9절).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징계는 자신의 혈기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10절) 그렇게 하신다. 징계는 받을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11절)를 맺는다. 유혹과 시험과 박해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 고난을 통해 유익한 열매가 맺힌다면, 그런 일을 당하여 “낙심하여 지칠”(3절) 것이 아니라 힘을 내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육신적인 피로감을 이기는 방법을 영적인 차원에 적용한다. “나른한 손과 힘빠진 무릎”(12절)은 독자들 중에 실제로 낙심하여 지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힘이 빠질 때 그대로 두면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역설적이지만, 힘을 낼 때 힘이 난다. 비틀비틀 걷다 보면 무릎이나 발목 뼈가 탈골될 수 있다. 힘이 들어도 똑바로 걷다 보면, 이골된 뼈까지도 바로 잡힌다(13절). 마찬가지로, 유혹과 시험과 고난을 당하여 용기를 내어 더욱 똑바로 살려 힘쓰면, 영성은 더 강해지고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11절)는 더욱 풍성하게 열린다.
묵상:
한 때, 자녀를 매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믿는 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잠언 23장에는 부모에게, “아이 꾸짖는 것을 삼가지 말아라. 매질을 한다고 하여서 죽지는 않는다.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목숨을 스올에서 구하는 일이다”(13-14절)라고 가르칩니다. 분별 없는 부모들은 이 가르침을 빌미로 하여 자녀에 대한 분노를 심한 매질로 표출하곤 했습니다. 그로 인해 몸에 난 상처는 얼마 후에 사라지지만, 마음과 정신에 남겨진 상처는 쌓이고 쌓여 그 자신의 영혼을 질식시키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흉하게 표출 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잠언 3장 11-12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징계가 부모의 징계와 다른 점을 밝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하는 징계는 동기가 잘못될 경우도 있고, 도에 지나칠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을 했을 때, 바른 동기로, 꼭 필요한 정도만, 바른 방법으로 징계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면, 전지전능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바른 동기로, 꼭 필요한 정도만, 바른 방법으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 쪽에서 보기에 부당해 보일 때도 있고 지나쳐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믿기에 그 징계를 달게 받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징계를 통해 정금같이 연단되어 나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유익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인간은 언제나 고난과 역경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역시 인간의 타락성의 반증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서 유혹과 시험과 박해가 다가올 때면 두려워 떨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기 좋게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유익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고난의 왕이신 주님, 유혹이든 시험이든 박해이든, 고난을 대면할 때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주님처럼 그것을 품어 안게 하시고, 고난의 불구덩이를 지나면서 정금같이 연단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이른 곳, 우리가 이를 곳 (히 12: 18-24) / 김영봉 목사 (0) | 2025.04.23 |
---|---|
똑바로 걷다.(히 12:14-17) / 김영봉 목사 (0) | 2025.04.22 |
믿음의 경주 (히 12:1-3) / 김영봉 목사 (0) | 2025.04.19 |
믿는 자의 실존 (히 11:32-40) / 김영봉 목사 (0) | 2025.04.18 |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두 가지 저항 (히 11:23-31) / 김영봉 목사 (0) | 2025.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