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13)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4. 05:56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가리키오. 초월(超越)은 인간의 인식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오. 하나님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나온 것이오. 철학도 그런 개념을 말하오. 플라톤의 이데아는 초월적인 세계이자 능력이오. 이런 초월개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소.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소. 특히 요즘처럼 모든 것들을 실증적으로만 계량하고 판단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오. 이런 경향을 불가지론이라 하오. 우리의 인식을 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주장이오. 불가지론 이야기는 그만 두고, 하나님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성서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게 좋겠소.

 

     성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하나님의 초월을 말하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 행위요. 자연 세계를 인간은 인식할 수 없소. 인간은 세계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해 있소.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으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고대인들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곤란하오. 지금도 우주의 신비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소. 그건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역사요.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인간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끌어가시는 분이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고,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소.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한다는 뜻이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이 초월성을 ‘절대타자’ 개념으로 설명하오.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유비’로 인식할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오.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도 단지 비유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의 인격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오. 하나님도 사람처럼 인식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이오. 그런 생각은 정확한 게 아니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인격과 비슷한 분으로 생각할 수 없소. 그것이 극단화하면 ‘신인동성동형론’에 빠지오. 오해는 마시오. 하나님의 persona(위격)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오. 다만 하나님을 인간적인 범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오.

 

     하나님이 초월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절대타자라고 한다면 인간은 무슨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거요? 초월철학은 그렇게 말할지 모르나 신학은 그렇게 말하지 않소. 하나님은 초월적이지만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오. 그는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오.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소. 신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나름으로 응답한 흔적들이오. 성서에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한 대목도 있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잘못 이해했다기보다는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거요.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아버지처럼 보호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분이시오. 그래서 주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로 시작하오.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소. 우리 생명의 온전한 보호자시오. 우리는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는 거요. 그런 기도 말고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2010년 8월1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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