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하나님의 은혜에 눈 뜰 때 (창 29:31-35)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6. 6. 05:59

해설:

레아에 대해 야곱은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계략에 의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그의 처지가 애처로웠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레아로 인해 칠 년이나 더 노예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레아대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끼어 파는 상품처럼 취급한 아버지에, 자신에게 의무적으로만 대하는 남편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동생으로 인해 레아는 삼중고를 겪었습니다. 그 상황을 주님께서 “보시고”(31절) 그의 태를 열어 주십니다. 하갈이 당하는 고통을 보신 주님이 레아의 고통도 보신 것입니다. 

 

야곱은 남편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위해 가끔 레아의 침소를 찾았을 터인데, 그럴 때마다 아이가 들어섭니다. 첫 아이를 낳고 레아는 르우벤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레아가 지었다는 말은 야곱의 무관심을 암시합니다. 레아는 아들로 인해 자신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변화 되기를 기대했습니다(32절).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둘째 아들을 낳고 시므온이라고 이름 짓습니다(33절). 혹시나 야곱이 바뀔까 기대했는데, 여전히 무심하게 행동합니다. 셋째 아들 레위를 낳고 나서 레아는 아들을 셋이나 낳아 주었으니 이제야 남편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34절).

 

얼마 후, 그는 넷째 아이를 낳고 유다라고 이름 짓습니다. 여전히 야곱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레아는 남편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넷째를 낳고 나서는 남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35절)고 고백합니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은 사이에 라헬에게는 아이가 하나도 들어서지 않습니다.

 

묵상: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주인공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삭과 야곱과 라헬에게 주목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조역들(이스마엘, 에서, 레아)이 겪은 고통과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공과 조역과 엑스트라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들은 역할만 다를 뿐 동일하게 중요한 자녀들이었습니다. 조역과 엑스트라들이 주인공의 그늘에 가려 고통 당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정을 보셨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랑 없는 강제 결혼을 통해 야곱도, 레아도, 라헬도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셋 중에 가장 큰 고통은 레아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저녁마다 동생의 침소를 찾는 야곱으로 인해 모진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쩌다 자신의 침실을 찾는다 해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의무방어전처럼 치루는 남편의 형식적인 처사로 인해 그는 동침할 때마다 성폭행을 당하는 듯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남편이 찾아 주지 않을 때는 외롭고, 찾아주는 날이면 혼란스럽습니다. 그로 인해 레아는 수 많은 나날을 눈물로 보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보셨고 그의 한숨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갈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레아에게도 함께 하셔서 다산의 축복을 주십니다. 레아는 아이가 들어설 때마다 남편의 사랑을 얻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아버지의 의무마져 레아에게 떠넘겼습니다. 야곱으로서는 라헬의 눈치를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언니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넷째 아이를 낳았을 때 레아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남편의 사랑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표현했던 레아는 유다를 낳고 나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이제야말로 내가”(35절)라는 말에서 레아에게 일어난 심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집착과 갈망을 내려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으로 충분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그에게 남편의 부재가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뜨자 그 불행이 작아 보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