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키르케고르의 기도

새벽지기1 2024. 2. 25. 07:11

키르케고르의 기도

 

덴마크의 수도이자 학문의 중심지였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곳에서 살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며, 니체와는 달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창함으로서 현대 사상에 기독교적 사유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개인의 실존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다. 합리주의적 사변의 비합리성을 공격하면서 개인의 열정, 결단, 도약 등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당대 중산층 기독교의 속물 성을 비판하고 신약 성경에 나타난 신앙을 강조함으로서 기성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길에서 졸도, 병원에서 앓다가 삶을 마감했다. 생전에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거나 오해를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현대철학의 선구적 존재, 탁월한 문학가, 교회를 향해 바른 소리를 했던 예언자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죽음에 이르는 병, 불안의 개념, 공포와 전율, 사랑의 행위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의 지식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 중 하나는 19세기의 고독하고 비극적인 인물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의 영향력은 인간의 사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감지된다. 신학, 철학, 심리학, 문학, 예술 그리고 성경 연구 등 모든 분야가 그의 정신과 영혼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아주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연구되고 논의되었으며, 올바로 이해되기도 했고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시인, 예언자, 철학자, 신학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는 그에게 공감했던 사람들과 대립적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그의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의 글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정신분석학자들, 로마 가톨릭 사람들, 개신교 사람들, 그리고 자유사상가들의 분석 대상이 되었다. 그를 어떠한 관점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느냐는 각자의 몫으로 남긴다할지라도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 씨름했던 종교적 사상가였다고 전제한다. 그가 집중했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개인의 실존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키르케고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그의 종교적인 저작들과 일기 안에 들어있다. 그의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저작들은 그의 종교적인 저작들의 빛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도의 사람

 

키르케고르는 기독교로 돌아오기 시작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삶과 사상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는 기도란 사람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사람은 기도의 이유를 묻지 말아야한다. 기도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은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는다. 기도는 사람이 자신을 새롭게 하고 자신의 영적 생명력을 재생해내는 수단이다.

 

학자들이 키르케고르의 삶과 사상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무시했던 원인 중 하나는 그들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주요 문제들에 대한 그의 공헌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인은 그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의 수수께끼들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비밀을 캐내려고 또한 그의 신비로움을 꿰뚫어 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이런 개인적이고 지극히 내면적인 측면에 대한 키르케고르 자신의 침묵이다. 그는 자신의 경건 생활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더구나 그의 입장에서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삶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믿음이나 기독론 같은 공적인 측면들에 대해 쓰는 것이 확실히 더 쉬었을 것이다.

 

그가 1849년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내면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즉 자신이 기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마치 부자지간처럼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고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의 내면성은 나에게는 너무 진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라고 썼다. 그는 기도의 의미와 자신의 삶에서 기도가 갖는 의미를 다룰 때 과묵해진다. 적어도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의 일기나 출판된 작품들 속에는 그의 삶과 사상에서 기도가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했다는 주장을 지지해주는 충분한 증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것을 기억하면서 키르케고르의 기도를 4부분으로 나뉘어 기록하려한다. 첫째,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둘째, 아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셋째, 성령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넷째, 특별한 때를 위한 기도 등이다.

 

2002312월 말에 발행된 마음의 청결(쇠렌 키르케고르 저, 이창우 옮김)의 책 표지 뒷면에서 누가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까? 왜 우리는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면서 간략히 발췌해 놓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계셔야만 이 청결함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요. 진리 안에서 이 한 가지만을 품은 사람만 오직 선을 품을 수 있습니다. 선을 품을 때, 오직 한 가지만 품은 사람이 진리 안에서 선만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불변하신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백 가운데 어떠한 것도 찾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 고백하는 자가 찾아냅니다. 전지하신 분께 고백함으로써 당신이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많은 것을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기고자 했던 당신 자신입니다." (본문 중에서)

 

마음의 청결은 결국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전능자는 불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경박한 생각이다. 기도하는 자가 불변하신 하나님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백 가운데 어떠한 것도 찾지 않으신다. 다만 당신, 고백하는 자가 찾아낸다. 전지하신 분께 고백함으로서 당신이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많은 것을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기고자 했던 당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빌기도 전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서 그 어떤 것도 찾지 않으신다. 우리가 친구에게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비밀을 고백할 때, 친구는 우리에게서 꼬치꼬치 그 원인을 찾고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엇도 추궁하거나 찾지 않으신다. 어쩌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 고백한 모든 죄악에 대하여 망각하시는 분과 같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 앞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기도의 무용론을 말할 것이다. 그런 자에게 키르케고르는 반문한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변화시킨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 속에 은밀하게 숨긴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청결은 기도로만 획득 될 수 있다. 그는 기도의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가장 진실 되고 선한 자신의 본연이 된다.

 

 

 

 

 

1. 하나님 아버지

 

, 인간의 우둔한 이성이여!

, 세상의 교활한 지혜여!

, 무기력한 신앙의 차디찬 사고여!

, 냉랭한 마음의 가련한 망각이여!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 변함없으신 주님,

아무것도 주님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 사랑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며,

특별히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떤 변화에도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불변성을 본받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조건 없는 순종 속에서 쉬실 곳을 얻고,

변함없으신 주님 안에서 안식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약간의 일관성이라도 지니려면,

그는 너무 많은 것들에 의해

너무 많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흔들리십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에 의해 흔들리십니다.

사람이 하찮게 여기고 무감각하게 지나치는

참새 한 마리의 곤경조차 주님을 움직입니다.

 

, 무한한 사랑이시여!

우리가 너무 자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람의 탄식조차 주님을 움직입니다.

, 무한한 사랑이시여!

 

, 흔들리지 않으시는 주님!

아무것도 주님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한한 사랑 안에서 흔들리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흔듦으로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변함없는 뜻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도

그런 흔들림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 변함없으신 주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주 하나님!

우리는 주님께서 오직 한 번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많은 나날 동안, 매일, 그리고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먼저 계신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먼저 계신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날의 괴로움에서 물러나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먼저 계셨고 또한 그렇게 영원히 계십니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오직 한 번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무한한 주님의 나라는 위대합니다.

주님은 별들의 무게를 견뎌내시고

광활한 공간에 퍼져있는 세상의 힘을 다스리십니다.

주님을 통해 존재와 생명을 얻는 것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외침을 들으시며,

특별하게 지으신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시되, 뒤섞인 목소리들을 혼동하지 않으시며,

듣기 좋은 기도만 차별하여 듣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무거운 책임을 맡은 사람의 기도만 듣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이를 가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만

듣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광야나 군중 속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 버림받은 사람,

가장 외로운 사람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고

군중에게 잊혀 져서 명단에 번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주님은 그를 아십니다.

주님은 그를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그가 움츠려 사막에 숨을지라도

군중 속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다.

그가 짙은 공포의 그림자에 싸여 있거나 두려운 생각에 빠져있거나

사람들과 사람들의 말에 무시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를 잊지 않으시고 그의 말을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소리처럼 빠르고 빛처럼 신속하게 그를 인도할 길을 찾으십니다.

 

주님이 기다리신다면, 그것은 우둔한 지체가 아니라 지혜입니다.

주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셔야 할 때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다리신다면, 그것은 인색함이 아니고

적절한 때에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안전한 곳에

남겨두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륜이십니다.

주 우리 아버지시여!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런 날에는 주님께 부르짖고

기쁜 날에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은 선하시며 또한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임을 쉽게 알아차릴 때,

또한 세상적인 사람조차 이해할 수 있고, 아주 신중한 사람조차 그것에 동의할 때,

주님께 감사드리는 감사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삶이 어려울 때, 주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큰 복이 됩니다.

우리의 이성이 그 모호함으로 우리를 배반할 때,

우리의 기억이 그 망각으로 인해 실수할 때,

우리의 자아가 두려움으로 인해 주춤거릴 때,

우리의 지혜가 반항이 아니라 낙심 속에서 저항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억눌리고, 영혼이 어둠에 쌓일 때,

그럴 때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복이 됩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

 

 

 

 

믿게 해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는 저의 영원한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수많은 질문들 중 하나에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또한 주님을 거슬러 불의를 고집하는 사람보다는

파도 위에 선 베드로가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영원한 행복을 저의 행위 위에

심지어 저의 최선의 행위 위에도 세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과연 선한 것이었는지는 오직 주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저의 영원한 행복을 제가 행한 최선의 행위 위에도 세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한 행위가 될지 어떨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를 넘어서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처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증명 너머에 있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백성에게 어떤 일을 하시든 그것은 무한한 사랑입니다.

제가 주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라고 느꼈던 때보다

제 안에 더 큰 진실이 있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제가 어떤 증거를 갖고 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아무런 증거 없이 그것을 느꼈을 때이며,

그 사실이 언제나 증거를 요구하는 교리가 아니라,

저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 자명한 공리가 되었던 때입니다.

, 그러나 주님은 제 영혼이 연약해질 때,

저를 증거 없이 남겨 두지는 않으십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변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1:17)

 

이런 말씀은 너무도 아름답고 우아하며, 감동적이고 위로와 격려를 주고,

너무도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고, 너무도 상쾌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 하나님!

그러므로 주님께 간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이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꺼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의 귀를 열어주십시오.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서 받습니다.

명예와 영광도 주님의 손에서 받습니다.

조롱과 모욕도 주님의 손에서 받습니다.

, 우리가 어느 것을 받더라도

똑 같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게 해주십시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 즉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2. 아들 하나님

 

약하고 어리석은 마음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는 어리석고 약하며

다른 것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닐 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잡아끄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유혹하는 힘을 가진 쾌락,

떠들썩한 수많은 오락들,

중요해 보이는 순간들,

떠들썩한 헛수고,

부주의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천박함,

우울하게 수심에 잠기는 침울함,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속여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우리를 자기에게(self centered) 이끌어갑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주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이시며,

오직 주님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주님께 이끄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주님께 이끄시기 위하여

우리가 자신을 살펴 정신이 들게 해주십니다.

높은 곳으로부터, 그러나 겸손과 낮아지심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낮아지신 주님에게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사람의 흥미를 끄는 것들은 많고 다양합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도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낮아지심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런 것을 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이신 주님,

주님은 강요받음 없이, 적어도 겸손해지도록 강요받음 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은 그런 겸손을 본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큰 영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낮아지신 주님에게 높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실

주님에게 이끌리게 해주십시오.

 

숭배가 아니라 따르게 해주십시오.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함도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예배를 받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신 것은 오직 사람들은 오직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망상, 즉 기꺼이 주님을 따르고 닮으려 하는 대신

주님을 숭배하려고만 하는 잘못에 빠져 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를 그런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아셨지만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고 비천하게 태어나셔서

가난과 낮음 속에서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미움 받고, 버림받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끝내는 하나님께 버림받아 수치스러운 죽음에 머리를 숙이실 때까지

언제나 고난 받는 자이셨습니다.

 

, 그러나 주님은 다시 머리를 드셨습니다.

영원한 승리자시여,

참으로 주님은 살아서는 원수들을 이기셨고

죽어서는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머리를 드셨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고,

하늘로 들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3. 성령 하나님

 

거룩한 영이시여!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질그릇 안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 거룩한 영이시여!

주님이 저희 안에 계실 때,

주님은 한없이 낮은 것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이시여!

주님은 불결과 부패의 한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지혜의 영이시여!

주님은 어리석음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시여!

주님은 혼란에 빠진 사람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계속 그곳에 계셔주십시오.

주님은 거기에서 주님이 거하실만한 곳을 찾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

그러나 주님이 몸소 그럴만한 곳을 마련해 ㅈ십시오.

 

, 사람 안에 계속 계셔주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주님이 이 어리석고,

기만적이고, 불결한 제 마음속에 마련하신

거처로 인해 흡족해 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영을 보내주십시오

 

, 성령님!

 

우리 자신과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질도, 세련됨도, 영리함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여기에 넘쳐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의 힘을 거두어가시고

대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우리에게서 힘을 거두어 가실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도 같은 불안을 경험합니다.

, 그러나 짐승들이라도 훌륭한 마부가 고삐를 잡으면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저항하지만

곧 그것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사람은 주님께서 그의 힘을 거두어가시고

대신 생명을 주시는 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즉각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 특별한 때를 위한 기도

 

성찬식을 위한 기도

 

주님은 타락한 족속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반당하고, 조롱당하고, 정죄되셨으나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며 사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며

다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구언자요 구속자이신 주님,

주님을 회상하는 거룩한 만찬에 참여하려고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 거룩한 은혜의 식사에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무언가 부족한 것인데,

이 거룩한 은혜의 식사에 주님의 은총이 없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것은 존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은혜의 만찬이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말년에 자기 시대의 중산층 기독교의 미지근함과 허세를 예언자처럼 공격함으로서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다.

 

키르케고르의 소명 의식

 

진정으로 내게 부족한 것은 어떤 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모든 행위보다 앞서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속에서 분명하게 정하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이 진정으로 내가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진리와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이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고 모든 철학 체계들에 통달하고 필요할 경우 그 모든 체계들을 비평하고 그 각각의 체계 안의 부조화를 밝혀낼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국가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고 그 이론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내가 그 안에서 실제로 사는 게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그것을 비추어 보기만 할 뿐인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기독교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나와 내 삶에 대해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리가 내 앞에서 차갑고 적나라하게 서 있을 뿐 내가 그 진리를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하지도 않고, 또한 내 안에 확신에 찬 헌신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의 전율만 일으킬 뿐이라면, 그런 진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분명히 내가 여전히 '오성의 명령'을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명령은 나의 삶 속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키르케고르의 전 생애와 사상은 그가 앞의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을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삶과 사상에서 지속적인 문제였다. 물론 그는 그의 풍요로운 사상 속에서 그와 동일한 생각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사람은 다른 것을 알기 전에 자신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자신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키르케고르는 자기가 그곳에서 전체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고자 했다. 그는 이것을 먼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에서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