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교회여! 제발 교회되기에 진력하라

새벽지기1 2023. 8. 11. 05:00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자 대안으로 기획된 하나님의 도구다.

 

아니 세상이 어떠하기에? 잘 알다시피 세상은 죽음이라는 절대한계 안에 갇혀 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죄에 감염되어 있다. 헛된 우상을 따르는 어리석음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세상은 쉬지 않고 발전해왔다. 인간은 그동안 뛰어난 통찰력과 죽음을 불사르는 열정으로 삶을 위협하는 온갖 난제와 싸워왔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였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 기적 같은 현실을 몸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꿈꾸지 못했던 찬란한 기술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 보통 사람들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이뿐 아니다. 개인의 권리는 하늘을 찌르고, 넘치는 시장은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기근과 문맹은 줄어들고, 각종 차별도 점차 완화되고 있다. 아직은 지구촌의 절대 다수가 충분히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역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역사가 발전했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 달라졌을까? 생활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삶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세상의 겉모습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사회의 기본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죄성을 포장하는 기술이 세련되었을 뿐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은 여전하다. 획기적인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생활의 질은 향상되었지만 문제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고, 사회적인 신분의 계층화는 심화되거나 고착화되고 있다. 사적인 폭력뿐 아니라 공적인 폭력 또한 그 기세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정녕 좋아졌는데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왜일까? 왜 세상은 좋아지는데 사는 건 여전히 힘들고 피폐한 것일까?

 

세상이 돌아가는 본성과 구조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땜질을 하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더 큰 구멍이 뚫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몰라보게 변하고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라는 절대한계 안에 갇혀 있고, 죄에 깊이 감염되어 있으며, 헛된 우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세상을 좀 더 낫게 하는 정도의 땜질을 해가지고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다. 땜질을 하면 할수록 땜질 자국만 많아지고 더 커질 뿐이란 걸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렇다. 땜질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물론 땜질이 필요하다. 삶의 질을 좀 더 인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유와 인권을 향상시키고, 폭력을 추방하고, 기근과 문병을 퇴치하고,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사악한 공권력을 근절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요 책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죽음에 갇혀 있고, 죄에 오염되어 있으며, 우상을 따르는 세상의 본성은 건드리지 않은 채 개선한들 무엇 하겠는가? 세상을 조금 낫게 고치는 것으로는 현재의 세상이 계속될 게 분명한데 그런 일을 반복해본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구멍 난 세상을 땜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를 원하신다. 창조의 현실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현실 위에 전혀 새로운 세계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을 다시금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현재의 세계와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불연속성이 있는 그런 세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현실화되는 그런 세계를 만드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된 삶, 우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죄인들을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 백성을 통해 세상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온 세계 전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요 구원 전략이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그 원대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대안으로 기획된 공동체다. 구원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책무를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을 땜질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부족한 것을 눈치껏 채워주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창이요 모델하우스로 기능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나라의 식민지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교회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에게 교회되는 것보다 더 중차대한 책임과 사명은 있을 수 없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보다 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최상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된다는 것이 매우 진부해보이고 미미해보일 수 있다. 교회가 되는 것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세상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를 알지 못한 순진한 생각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적인 관점일 뿐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독특하고 탁월한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투쟁이나 혁명보다 더 근원적인 혁명이고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투쟁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 변혁’과 ‘사회 구원’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의 집합 개념으로 설명해보겠다. 한 마디로 말해 ‘사회 변혁’은 ‘사회 구원’의 부분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사회 변혁’은 죄로 인해 야기된 사회의 여러 문제를 그때그때 땜질하듯 고치는 것인데 비해 ‘사회 구원’은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을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얽매였던 삶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나라의 삶, 자유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 변혁’은 삶의 정도를 좀 더 낫게 개선하는 것이고, ‘사회 구원’은 삶의 차원을 아예 달리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교회가 사회를 변혁하는 일에 힘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의 어둠과 씨름해야 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 변혁에 참여하고, 또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교회다울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열매 중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는 처음부터 ‘사회 변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변혁’을 뛰어 넘는 ‘사회 구원’을 위해 계획된 하나님의 기관이라는 것을. 때문에 교회가 사회 변혁에 참여하고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써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하려 드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교회가 아니라도 뜻있는 시민들이 힘을 모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양식있는 시민들이 힘을 모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일이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의미하고, 또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 정도의 일에 올인해서도 안 되고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이다.

 

그렇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회 변혁’보다 훨씬 깊고 근본적이며 혁명적인 것이다. 교회가 정말 진력해야 할 것은 ‘사회 변혁’을 훌쩍 뛰어 넘어 현재의 사회와는 그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다른 구원 공동체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이야말로 교회의 독특한 책임이고, 교회만의 고유한 존재 이유다. 교회가 세상 모든 것과 달라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는데 진력하기보다는 세상을 수선하려 했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얻으려 했다. 아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로 미루어버린 채 세상을 수선하고 얻기 위해 골몰해 왔다. ‘교회가 되는 일’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니까 사람들 눈에 잘 띄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효과가 있는 ‘세상을 수선하는 일’에 달려들었다. 마치 그 일이 하나님이 교회에 위임한 일인 양 설교하면서. 물론 나는 지금 교회가 세상을 수선하는 일에 힘쓴 것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 담을 쌓고 외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단지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교회의 일차적인 책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런 일로 교회의 책무를 치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교회가 그런 일에 힘쓰면 힘쓸수록 교회의 정체성은 훼손되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환기하고 싶을 뿐이다.

 

또 교회가 교회되는 일보다 세상을 수선하는 일에 더 몰두한 것은 교회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나를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지만 나를 따르는 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진실로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교회가 교회되는 일이다. 아니, 정직하게 실상을 말한다면 그 일은 이 땅에서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여, 그동안 수많은 교회들이 그 길을 피해왔다. 교회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수선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 책임을 다한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 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그런 일로는 결코 교회의 책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을 섬길 수도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교회가 세상을 수선하겠다고 달려드는 그 중심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교회가 세상을 수선하겠다고 달려들면 들수록 이상하게도 교회의 정체성이 해체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담보하고 증언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반대로 생각해보자.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비록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교회가 생명을 다해 교회되는 일에 헌신한다면, 다시 말해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참 모습을 삶으로 보여줄 수만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정녕 세상을 수선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된 삶, 우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이끌어주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된 삶, 우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고, 부활하셨다. 또 이 땅에 당신의 백성(교회)들을 불러 모으신 것도 당신의 백성(교회)들을 통해 세상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피조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탁월한 전략이다. 때문에 교회는 다른 일이 아니라 바로 이 일, 교회가 되는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해야 한다. 비록 그 일이 이 땅에서는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진력해야 할 일이 그 일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위한 최고의 봉사요 최상의 헌신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