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삶’과 ‘앎’이 합쳐져 생겨난 단어입니다. 살다가 알게 되고, 깨닫게 된 앎을 살면서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살던 대로만 살며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깨달은 앎대로 살지 않을 때, ‘사람’이 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는 참담해 집니다.
심리학자 베링거의 말입니다. “현재의 실패나 성공은 10%만 사실이다. 나머지 90%는 그에 대한 반응이다.” 재기가 불가능할 것 같은 실패도 사실은 10%의 실패입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잘 살아내면 성공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성공도 10%의 성공입니다. 성공을 발판삼아 성장하지 않고 자만하고 안주하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서 최고의 성공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참담한 도망 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평안에 안주하는 동안, 아들 압살롬이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나 성읍이 아닌 광야로 다윗은 도망합니다.
일군의 사람들이 다윗의 도망 길을 동행합니다. 얼마나 갔을까, 가드 사람 잇대가 군사 육백을 거느리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람들을 만납니다. 대제사장 사독과 레위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다윗을 따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다윗의 정통성을 수호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거절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살았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 이후 10년 만에 다시 찾은 태도입니다.
또 얼마를 가다가, 이번엔 시무이라는 자를 만납니다. 그는 사울의 친척으로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는 목청껏 다윗을 저주하며 돌멩이를 던집니다. 다윗의 신복 아비새가 칼을 빼듭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합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1)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에 저주는 없습니다. 저주에 대한 자신의 반응만 있을 뿐입니다. 비난과 저주에 대항하고 화를 내면 그때 정말 저주가 되고 재앙이 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저주하고 비난하며 걸려들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또 얼마를 가다가, 뼈아픈 보고를 받게 됩니다. 다윗 옆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버금갈 정도의 모략을 펼쳤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마음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다윗은 배신감을 갖지도,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맡겨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광야는 다윗의 믿음이 회복되는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겸허히 지난 잘못을 깨닫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사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행동하였습니다. 다윗은 친구인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고, 훗날 그는 다윗의 복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합니다. ‘하나님 없이’라는 말은 불신앙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믿고 열심히 기도한다. 나는 내게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믿고 열심히 일한다.”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자신에게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마음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신앙의 결론입니다. 절망과 근심, 무기력에 안주하며 평안에 머무르는 것은 병든 신앙입니다. 다윗이 평안에 안주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세계는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이것이 “시내산 계약” 입니다.
시내산 계약을 통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노예 이스라엘이 일약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세상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지 거부하는지, 안주하는지 행동하는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것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시며 행하셨던 성례는 바로 ‘시내산 계약의 갱신’입니다. 우리들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예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고 새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처사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기도하고 행동에 돌입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다시 왕위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더 나쁜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의 상처나 회상하고, 현재의 무기력에 빠져,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묵히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430년 노예 이스라엘의 행동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듯이, 우리의 생각 하나 행동 하나에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현재에서도 예수님은 언제나 ‘길’이십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예수님은 늘 ‘진리’ 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 가르침대로 살면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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