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내가 당하는 혼란스런 단편들이 제 자리를 찾고 차분히 다음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우리의 삶은 혼동과 공허와 흑암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것들을 거둬주시는데, 그 출발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중심까지 비춰내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도망자가 된 다윗은 그 도망길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이 고행길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는 것이며, 과연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재기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러나 이 최악의 혼란과 불확실 상태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다윗은 사생결단하고 하나님 앞으로 달려갔고,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생생한 실체로서 다윗 앞에 서계십니다. 다윗 앞에 서게 되신 하나님의 생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삼하 17:14)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더라.” 이것으로 상황 종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책략을 세우고, 잘 훈련된 군사와 막강 화력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기로 작정하시면 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의 섬세한 진행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압살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십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작전참모입니다. 그는 다윗을 무너뜨릴 책략을 압살롬에게 고합니다. 아히도벨의 책략은 다윗을 없애는 최선책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의 의견을 보류하고 후새에게 묻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작전참모로 압살롬 곁에 남겨둔 사람입니다. 압살롬은 후새의 책략을 채택합니다. 각 지파에게 전령을 보내고 군대를 소집해야 하는 후새의 전략은 많은 시일이 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쫓기는 다윗에게 넉넉한 시간을 벌어준 것입니다. 그러자 이 일로 실망한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내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압살롬의 최고 브레인까지 제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보호가 이어집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두 밀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만 한 소년에게 들키고 맙니다. 소년은 즉시 압살롬에게 신고합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계집종을 보내십니다. 계집종은 두 밀사를 우물에 숨겨줍니다. 군사들이 달려와서 추궁하지만 이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시내를 건너가던데요.”라고 연기를 합니다.
그렇게 압살롬의 작전 정보가 고스란히 다윗에게 넘어가게 되어, 다윗은 여유 있게 요단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였고, 압살롬은 뒤늦게 이스라엘 전군을 이끌고 나타났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보호하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일군의 사람들을 보내셨는데, 이들을 통해 다윗과 그 군대에 꼭 필요한 것들, 대야, 질그릇, 밀, 보리, 밀가루, 버터, 치즈 등을 보내신 것입니다. 너무나 섬세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반드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섬세한 손길로 그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창조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로 만물을 창조해 나가십니다. 왜 악인들을 즉시 멸하지 아니하시는가, 나 또한 악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사랑의 한 면입니다. 왜 징계하시는가, 이 역시 사랑과 공의의 한 면입니다.
압살롬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세력을 모으고 다윗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고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반은 ‘거짓’입니다. 진실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허구’입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어디에 세우고 있습니까? 내가 서있는 기초 여기저기에 거짓이 뒤섞여 있고, 설사 근면과 성실로 세웠다고 하더라도 사랑과 공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아집과 오기로 지은 나도 있고, 불평과 원망과 야망, 무지와 게으름 등, 이런 것들이 뒤엉켜 현재의 내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아닙니다. 방치했다가는 끝내는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8:24-25)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면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사랑과 공의의 굳건한 기초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살다보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게 되고 어느 새 아름답고 건실한 내가 세워집니다. 이것이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원리, 곧 하나님의 작정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두려움과 근심 걱정, 분노와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믿고 그 기초 위에 나를 다시 세우십시오. 그리고 차근차근 열심히 사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할 것입니다.
“내 평생에 여호와 앞에서 행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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