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세례!-그리스도와 연합함이다! (롬6:1-11; 성화(聖化)의 근거)

새벽지기1 2019. 2. 14. 07:13

6

7

8

세례와 성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

6:1-11 세례-그리스도와 연합

6:12-23 성화의 자세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리라!(6:13)

두 법 사이에 낀 성도의 삶-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7:24)

내가 확신하노니...(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8-39)

성도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의의 확신)



세례!-그리스도와 연합함이다!

(6:1-11; 성화(聖化)의 근거)

 

본문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해석과 설명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전개해 나가면서 당시에 있었던, 혹은 있을법한 반론들을 예상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3)으로 변론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논지를 더욱 분명히 하고자 했다. 본문도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여기서 그런즉이 무엇을 받는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1절의 내용상 5: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받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자신의 율법의 역할에 관해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율법 무용론(無用論)’ 내지는 율법 폐기론(廢棄論)’을 주장한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음을 들어 이제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말하기 위해 도입한 구절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이 롬5:20절을 언급한 것은 율법으로 인해 죄를 죄인 줄로 알고 절망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죄 사함과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알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바울의 적대자들이 이를 왜곡해서 이런 궤변을 주장했다.

첫째,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더욱 풍성히 임한다면 인간이 죄 짓는 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둘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죄는 은혜를 촉진하는 것이 되므로 오히려 은혜의 수단으로 죄를 장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바울은 여기서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여기서 그럴 수 없느니라는 앞 절에서 언급한 궤변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력한 부정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서 죽은(;아페타노멘)’은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는 이미 성도들이 골고다의 십자가상에 다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전이 죄악 된 행실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서 더 이상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그 통양과 대기에서 자라고 호흡하지 않으면 그 지배하에 머물지 않는 것’(바르트)을 말한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할지라도, 즉 죄에 대하여 죽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를 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비록 의롭다 하심을 얻어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죄의 성향을 지닌 자아가 단번에 완전한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2)를 부연 설명하는 구절이다. 즉 바울은 성도들이 죄에 다하여 죽었다는 것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맛보신 예수와 합하여 세례 받은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한편 여기서 세례(;밥티조)’

문자적으로는 물에 잠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의식상 물에 잠그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다는 의미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를 죽이고 정결한 새 생활을 하게 됨을 상징하는 것이자, 이를 다짐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적 행위.

특히, 세례식은 이를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도 이 사실(앞 내용)을 분명히 알고 있는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의미의 완곡한 표현이다.

바울은 구약시대로부터 시행해 온 정결의식을 행해 온 유대인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에서 시행됨으로 누구나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세례의식의 의미가 죄에 대해 죽고 의로써 다시 사는 중생의 복음을 확증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바울은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3절의 세례와 관련하여 세례의식 가운데 내포된 장사되었다는 개념까지 동원하고 있다.

여기서 장사되었다함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 무덤에 장사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조차 죽어 없어짐으로 완전히 속량(贖良-redemption)된 것을 의미한다.(3:13) 즉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완전히 무덤에 장사되었으니 다시금 법적 죄인으로 우리의 신분이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여기서 아버지의 영광은 성부 하나님의 신적 권능과 불멸성, 그 밖의 하나님이 인간과 구별되게 지니신 각양 속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6) 우리가 물로써 세례를 받는 것 자체가 이를 상징해 주고 있다. 세례시에 물에 잠기는 것은 옛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을 의미하며,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선 이 구절에서 되었으면되었으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왜냐하면 이는 조건문이나 가정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합한(;쉽퓌토이)’접목(接木-engrafted)’ 이란 뜻이다. 즉 이는 단순히 함께 자라는 것 뿐 아니라, 질이 다르던 나뭇가지가 한 나무에 접붙임이되어 같은 성질로 변화되는 것(11:17)을 의미한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에 안주하던 옛 성질이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되리라(;에소메다)’는 미래시제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었듯이 성도의 부활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일어날 확실한 미래적 사건임을 뜻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우리가 알거니와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본능적 지식인 오이다가 아니라, 신앙적 체득을 통한 지식 기노스코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론적으로 안다면 경건의 모양은 흉내 낼 수 있겠지만 경건의 능력은 발휘 될 수가 없다.(3:5)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여기서 옛 사람은 같은 문장의 죄의 몸과 같은 의미로 정죄 아래 있던 거듭나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

즉 죄이 종노릇 하던 사람을 가리킨다.

본 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것(3)을 가리킨다.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죄의 몸은 앞의 옛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의 육신 자체가 죄악 되거나 죄악 덩어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너희 몸이 성전’(고전3:16)이라고 한 말씀과 정면으로 상충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죄의 주관 아래 예속되어 있던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은 성도는 다시 죄에게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법정용어로서 형(사형)을 집행당한 자가 형벌을 받음으로써 법의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단어로, 실제적으로는 형(사형)집행 중에 예수께서 속량(대속)하심으로 석방된 상태를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8)

이는 앞서 5절에서 언급한 사실을 반복하고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5절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결과라면, 본절은 성도들이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11)로 여겨야 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3절의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같은 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대속 죽음의 효력이 모든 성도들에게 미침을 보여준다.

여기서 믿는다(; 피스튜오멘)’전폭적으로 맡기다는 뜻으로 조금도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이는 예수께서 단 한번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모든 자들을 위한 대속사역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7:26-27). 그리고 그 효력은 영원하다.(9:12)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결코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의 구원도, 믿음도 헛것이 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여기서 주장하다(;퀴리유오)’는 본래 주인이 되다는 뜻으로 주인 된 자격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다시라는 단어다. 이는 마치 사망이 예수를 다시 지배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망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지배할 수 없다. 다만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성육신하셔서 자발적으로 죽음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주셨을 뿐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여기서 죄에 대하여란 구약의 제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단 번이라는 그 효력의 제한성이 있었다. 매번제사를 드릴 때만 효력이 있었지만,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대속)은 단 한 번의 죽으심(대속)으로 그 효력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여기서 하나님께 대하여란 직역하면 하나님 안에서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의 뜻이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즉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는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9-10)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며 그의 부활은 스스로 살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안에서 다시 살아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라는 말과 여기다라는 단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입었고 영생을 얻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확신해야 한다.

여기서 여기다(;로기제스데)’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는 명령이다.(해리슨)

 

교훈과 적용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이것은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이다.

첫째,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더욱 풍성히 임한다면

인간이 죄 짓는 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둘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죄는 은혜를 촉진하는 것이 되므로

오히려 은혜의 수단으로 죄를 장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바울은 여기서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2)

이는 이미 성도들이 골고다의 십자가상에 다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

여기서 장사되었다함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 무덤에 장사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조차 죽어 없어짐으로 완전히 속량(贖良-redemption)된 것을 의미한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6)

그러면 이제 구원받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소극적으로는 죄 가운데 살지 않아야 한다.

적극적으로는 거룩한 삶(성화)의 살기 위해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한다.

그래서 삶은 영적 전투인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자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