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세월을 아끼라’(1): 시간의 중요성과 그 의미 (엡 5:15-18)

새벽지기1 2017. 12. 3. 06:5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5-18)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천지창조도 시간과 공간의 창조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의 창조였다. 그런 점에서 천지창조는 인간 삶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삶과 직결되어 있는 공간과 시간 가운데 인간이 보여준 보다 큰 관심은 공간이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가장 확실한 부동의 재산이다. 그 땅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가 곧바로 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땅의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국가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여 시간은 비가시적인 것이어서 소홀하게 취급되기 쉽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생긴 것도 시간의 중요성을 쉽게 놓치는 인간의 습성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땅의 소유 이상으로 중요하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 곧 신앙의 바른 지혜라고 강조하였다. 시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려면,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삶과 관련하여 시간의 특성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시간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간의 확실성이란 인간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곧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정해진 수명을 갖고 한 평생을 살다가 죽게 되어있다. 그렇게 정해진 각자의 수명을 잊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이다. 삶의 정해진 한계를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편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가 바로 그 의미이다.

 

시간의 불확실성은 그 수명이 끝나는 시점이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명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료 시점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게 되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에 걸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시점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지 않을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의 불확실성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를 '인간의 허탄한 자랑'이라고 평가하였다(약 4:13-16). 우리는 잠시 뒤에 일어날 일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빠진 채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헛된 자랑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혜를 누린 인물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다. 그런 솔로몬이 말년에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정리한 내용이 전도서이다. 겉으로 드러난 전도서의 중심 주제는 만사가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그 헛됨의 극복 방법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전 12:13)이라고 하였다. 시간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헬라어에서 시간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으로서 측정이 가능한 객관적인 시간이다. 영어로 ‘연대’ 혹은 ‘연대기’를 ‘크로니클’(chronicle)이라고 하는데, 이는 ‘크로노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한정된 수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크로노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확실성의 시간이며, 인간 삶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결정과 관련된 사건으로서의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하나님 중심적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로서의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도 정확한 시간을 제시할 수 없는 종말은 대표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개인적 종말인 각자의 죽음이 불확실성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속한 ‘카이로스’이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시간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정의 양면처럼 하나이다. ‘크로노스’는 인간 삶의 기본을 담는 그릇이라면, ‘카이로스’는 그 그릇에 담기는 의미들이다.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양적인 ‘크로노스’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 안에 가치 있는 질적인 ‘카이로스’가 담겨야 한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양이 아닌 질적인 것으로 간직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