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구유에 누이신 메시야

새벽지기1 2017. 8. 14. 07:12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예언하셨고, 모든 역사를 주관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유일한 분입니까. 예수님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세상의 모든 위인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출생이후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산 이후에 어떤 자각이나 통찰, 내려놓음 등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과 나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이후에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기독교를 창설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역사가운데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삶은 ‘언젠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역사적 근거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낼 때 누구를 통해 어떻게 보낼지를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오늘은 2장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출생할지를 어떻게 준비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부강했던 로마의 평화시대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전 로마 통치지역은 호적 등록을 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1~2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BC31년부터 AD1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입니다. 줄리어스 시저의 조카입니다. 그는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당한 후에 클레오파트라에 빠져있던 안토니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가이어스 쥴리어스 옥타뒤어스였는데 후에 시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행정의 천재라고 불린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통치한 41년을 역사가들은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벽돌로 지은 모든 건물과 도로가 대리석으로 바뀌었고 해적이 드나들던 바다에는 무역선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와 국방이 부강했습니다.
모든 나라가 법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법치 행정국가가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융성해서 헬라문화가 꽃피었던 시대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나오는 시대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유대한 지도자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타이밍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를 통치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적인 지도자였지만 그를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우수스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가장 중요한 준비들이 이뤄졌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에게 나게 하셨다”(갈 4:4).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계획하신 모든 것이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배하던 때에 많은 길을 닦았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깔렸습니다. 로마가 통치하던 곳은 어느 곳으로든지 갈수 있는 좋은 도로였습니다. 좋은 길이 닦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부활 사건이 증거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보급되면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던 구약성경이 헬라어로도 번역되면서 이방인들이 구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 사전정보가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메시야로 행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기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의 평화시대는 완벽한 통치시대였기 때문에 그 어떤 시기보다 메시야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 ‘호적등록’


누가복음은 세계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절대 통치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메시야를 이 세상에 오도록 준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융성기보다 더 큰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역사를 AD와 BC로 나눴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세속적인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4~5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통치영역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호적을 등록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메시야의 부모가 될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나사렛에 살고 있었을까요.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필요로 하는 제사 동물들을 공급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잠깐의 휴식처를 제공하는 타운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젊은이들이 동물을 키우면서 냄새 나는 곳에서 살고 싶어 했겠습니까. 베들레헴 곳곳에서 동물의 분뇨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곳은 젊은이들에게 비전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하는 이유는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희년이라는 제도 때문입니다. 이 제도는 50년이 되면 재산이 원소유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고팔수 있지만 원 소유자는 바뀌지 않는 제도입니다.
요셉에게도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소유지에서 호적을 등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입니다. 진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막강한 로마의 통치력, 행정력, 정치력이 없었다면 만삭인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움직였을까요. 호적 등록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언덕을 올라가는 지형이기 때문에 만삭의 몸으로는 걷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로마의 강력한 통치가 아니었다면 마리아도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까지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강력한 통치에는 한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가장 작고 누추한 곳에 오신 예수님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비록 네가 유다 족속들 중 아주 작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너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먼 옛날,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미 5: 2).
베들레헴이라는 명칭도 예수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풍성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영적인 생명의 떡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떡집에 태어나신 것이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베들레헴의 역사는 예수님을 준비하는 역사였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의 출생지입니다. 다윗의 할아버지가 오벳입니다. 오벳의 부모가 보아스와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가 베들레헴 출신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이 죽고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를 만나서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의 아들이 이새, 이새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있는 동물의 먹이통인 구유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의 가장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다.


구유와 십자가


“그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해산할 때가 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고는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6~7절).
빈방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마리아가 만삭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는 숙소를 이용하는 방법이 선착순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해야 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만삭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걸음이 늦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방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이 묵을 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누이신 곳이 구유입니다.
메시야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 동물의 먹이통이요, 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입니다. 요즘 성탄을 맞이하면서 트리 장식을 매우 화려하게 합니다. 그런데 트리가 화려해지면 화려해질수록 불안하고 공허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곳은 화려한 트리가 아니라 구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뉴저지에서 살던 곳은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멋있게 만들었습니다. 온 집을 트리로 휘감고 네온사인을 켜는 집이 있는가하면 해골로 뒤덮인 집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트리를 보면서 저는 그분들이 과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맞는지 의심을 했습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우리나라의 위대한 군인이었던 채명신 장군께서 장군의 묘에 묻히지 않고 사병의 묘에 묻힌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까. 그분은 자신과 함께 싸웠던 병사들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구유에 누이신 그분의 가르침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동물 사육장에서 태어나신 것은 말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지역이라도 아기는 가장 깨끗한 곳에서 맞이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동물의 먹이통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메시야인 그분이 구유에 누이심으로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누이지 않고 왕궁의 요람에 누이셨다면 가까이 갈수 있는 사람과 가까이 갈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먹이통에 누이신 그분에게 누가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까. 그 먹이통을 쳐다본다고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든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소외시키거나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누구나 기꺼이 맞아주십니다.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장소로 구유를 선택하셨습니다.
둘째,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야비하고 잔인한 사람,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물의 구유통도 요셉과 마리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렸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배에서 물위를 걸으셨고, 다른 사람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무덤도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예수님은 가난한 인생이었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 서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유보다도 더 지저분하니?”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하심을 통해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하늘의 침대에 눕히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누어야 할 곳에 예수님을 누이고, 우리가 못 박혀야 될 곳에 예수님을 못 박으셨습니다.


여러분, 그분이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부유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맞이할 방이 있습니까. 우리의 방은 더럽고 추하합니다. 방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모실만한 방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머라고 하실까요. “구유보다도 더 지저분하니?”
제 마음이 더러워서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구유보다 더 지저분할까?”


예수님이 오실 여지가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구유처럼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오신 것은 더럽고 추한 우리의 마음속에 오시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은 영어로 ‘Room’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러분, 여지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오실 여지가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관계 속에 예수님이 오실만한 여지가 있습니까. 우리의 대화 속에 예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있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해서 예수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없습니다. 관계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도 예수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진이 걸려 있고 십자가가 걸려 있는 물리적 예배당은 있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없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가운데 주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복된 성탄절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 보좌 버리시고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동물의 먹이통에 오심으로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세상은 구별하고 차별하는 사람들뿐이지만
주님은 우리와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편 속에 찾아오시고
더럽고 추한 마음속에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외롭고 억눌리고 안타깝고 억울한
고난 속에, 가난 속에, 상처 속에 있는 모든 영혼들 마음속에
구유에 오신 메시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의 구유에 찾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두렵거나 외롭지 않고
가난한 자도 실패한 자도 아니며
절망에 빠질 자가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