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다윗과 밧세바 (사무엘하 11:1-13)

새벽지기1 2017. 8. 8. 06:53


오늘 본문은 매우 어두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타락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최초의 타락에 버금갈 정도로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성공담보다 타락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믿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육신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0장까지 보면서 우리는 다윗의 훌륭한 신앙과 인격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1장 이후부터는 다윗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고 징계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과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은 골리앗과 밧세바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잔인하고 포악한 남자고, 밧세바는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윗을 시험대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 때와 밧세바를 만났을 때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 때는 젊고 무명의 사람이었지만, 밧세바를 만났을 때는 나이 오십이 넘은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났을 때는 목동 생활을 했고, 미래가 밝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를 만났을 때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상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만났을 때는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었고, 밧세바를 만났을 때는 기도와 믿음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시기였습니다. 그가 고난가운데 있었을 때는 영혼이 맑고 정결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풍요로워졌을 때 그의 영혼은 부정했고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윗은 주변의 거의 모든 국가를 정복한 왕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정욕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정치, 군사, 경제적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영적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다윗’


오래 전 <한국신문>에서 ‘성공하는 지도자들이 왜 타락하는가?’라는 사설에 게재된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논문의 제목은 ‘밧세바 신드롬’입니다. 논문의 주요내용은 사람들은 성공에 다다랐을 때 포커스를 잃어버리고 성공 너머에 있는 실패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정보와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자만에 빠져 밧세바 사건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다윗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하들만 전쟁에 내보내도 될 만큼 국력이 신장된 상황에서 밧세바가 만났습니다.
11장 1절에 보면 봄에 암몬과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봄에 전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왕궁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윗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죄로 얼룩진 승리였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다윗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윗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헌신적으로 싸워야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있지 않고 왕궁에 있었습니다. 그의 자만심, 교만, 안일함, 태만함, 나태함 때문입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영적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 의무를 게을리 하는 때를 사탄이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도 다윗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어느 날 저녁에 침대에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은 다윗이 안일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 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왕궁에 있는 것도 합당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날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 여인은 엘리압의 딸이고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밧세바의 남편은 ‘우리야’입니다.‘여호와의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개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주변에 있었던 30명의 용사에 포함되는 충신이었습니다. 또 밧세바의 할아버지는 다윗의 정치 고문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다윗이 밧세바에 대해 알아보았을 때 그녀가 자신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습니다. 만약 밧세바가 누군 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멈췄다면 다윗은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습니다. 다윗이 우연히 밧세바를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이후 행동은 매우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또 사람을 보내서 그 여인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만남을 사랑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로망스라고 봤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노망으로 보셨습니다. 다윗은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멸망의 만남으로 보셨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사람을 보내 더 큰 유혹을 만들었고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죄가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렌 레드파드 목사님은 이 사건을 다윗이 20년 동안 죄라고 여기지 않은 것들이 쌓여 일어난 문제들의 절정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클라이맥스라는 것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다윗의 행적을 돌이켜 보면 문제가 될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순간에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커지고 마지막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5장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다고 했습니다. 잉태한다는 것은 쌍방 간에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심이 유혹과 하나가 되어서 죄를 낳는 것입니다. 유혹이 있더라도 욕심이 반응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고, 욕심이 있다할지라도 유혹이 없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욕심과 외부의 유혹이 하나 되면 죄를 잉태하게 됩니다.


다윗의 죄는 지난 세월 동안 잉태되었습니다.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죄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다윗이 왜 밧세바를 취했겠습니까. 다윗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 마음대로 여인들을 취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왕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문제의식 없이 반복되던 일


“왕은 많은 아내들을 두지 말라. 그래야 그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왕은 또한 은과 금을 많이 모아 두지 말라”(신 17:17).
다윗은 은과 금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예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명령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왕으로 직위 하기 전에 세 명의 아내를 두었고 왕이 된 이후에는 다섯 명의 아내를 더 두었습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은 고대 왕들의 행동으로 볼 때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은 다른 세상의 왕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하기보다 세상의 문화수준, 세상의 윤리기준에 부합한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삶을 20여 년 동안 산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반복되었던 일입니다.
다윗은 밧세바 이전에도 많은 여인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윗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을 정도로 영적감각이 둔해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양심도 어느 영역은 민감하게 살아있지만 어느 영역은 둔감해진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영역만 살아있다고 해서 양심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한술 더 떴습니다. 그는 다윗보다 많은 아내를 두었습니다. 솔로몬은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을 두었습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한 명의 아내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명의 아내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취하고 집에 돌려보낼 때까지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황합니다. 그때부터 사실을 은폐하기 하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


첫 번째 은폐시도는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야를 불러냈습니다. 전쟁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우리야를 불러내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밧세바를 취해 생긴 아이를 우리야의 아이로 위장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우리야는 충신이었습니다. 다윗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장막에 있고 내 상관이신 요압과 내 주의 군사들은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혼자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함께 누울 수 있겠습니까? 왕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는데 저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11절).
우리야의 충성과 다윗의 간교한 음모가 대조됩니다. 우리야가 충성스런 태도를 보였을 때 다윗은 뉘우치고 회개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야의 충성스러움을 통해서 다윗을 일깨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깨우치지 못하고 다음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번째 은폐시도는 우리야를 불러 잔치를 벌이고 술에 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취했던 다윗이 술에 의지해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 앞에 있는 병사들과 함께 잔다고 했습니다. 술 취한 우리야가 다윗보다 경건합니다.
세 번째 은폐시도는 우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다윗의 간음죄가 살인죄로 확대되어 갑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있는 요압에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야가 앞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남은 군사를 철수 시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우리야의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 요압은 이 편지를 받자마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파합니다. 보지 않고도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안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요구대로 해줍니다. 다윗의 요구를 들어주면 엄청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고 다윗의 약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압은 충신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진정한 충신은 지도자가 잘못된 일을 행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할 줄 아는 것이 충신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죄 끊어내야


다윗이 우리야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무고한 병사들도 함께 죽였습니다. 우리야만 죽으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으니까 주변에 있던 군사들도 한꺼번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했을까요. 당시 왕의 위치에서 여인을 취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범죄가운데서도 율법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간음죄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다윗이 은폐하려고 했던 이유는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모두를 범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회개하면 될 일을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피하면 된다고 유혹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감추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회개하고 끊어내지 않으면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다윗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죄를 끊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랍니다. 더 큰 죄를 생산합니다. 우리야가 죽은 후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할 때까지 1년 동안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그때가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절대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서 죄를 고백하게 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나단은 비유를 들어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양과 소가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잔치를 벌였다’라고 하자 다윗이 흥분합니다. 나단이 말합니다. 바로 당신이 그자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지적을 받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남아 있는 희망이었습니다.


다윗은 부인하지 않았고, 더 이상 은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의 지적에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회개 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웠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내가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었고 네 주인의 아내들도 네팔에 안겨 주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도 네게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자랐다면 내가 더 많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짓을 했느냐?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칼로 쓰러뜨리고 그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했다. 그러니 그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악을 일으키겠다. 내가 바로 네 눈앞에서 네 아내들을 데려다가 네 이웃에게 줄 것이니 그가 밝은 대낮에 네 아내들을 욕보일 것이다. 너는 아무도 모르게 그 짓을 했지만 나는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삼하 12:7~11).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심판하셨고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의 대가는 치르게 하십니다. 용서했다고 해서 대가가 면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를 맛보게 하심으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날마다 깨어있으라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그의 가정과 나라에 임했습니다. 그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범하고 그에 대한 복수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깨어있지 않을 때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까. 죄는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순종의 자리를 지키고 말씀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를 지키십시오. 영적 위험으로부터 쓰러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를 고백하고 정결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마음을 새시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일러스트 y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