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이 땅에 영원히 육체로 거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나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때가 되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메시아의 삶을 시작했고, 때가 되자 죽음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과 조촐하게 이별식을 행한 다음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난다.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먼데, 어떻게 보면 이제 시작인데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 떠난다는 것인지, 예수님의 떠나심이 어떤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와 희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만 가지 근심이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위로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다,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14장).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열매를 많이 맺어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니 내 안에 거하기를 힘쓰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냉정한 진실 하나를 일깨워줬습니다. 너희가 열매 맺기를 힘쓰되 열매 맺는 너희는 세상에게 미움을 받는다, 내가 세상에 왔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미움을 받는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명심하라고 일깨워줬습니다(15장).
그런데 16장에서 요한은 또 다시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v.7).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무엇이기에, 성령이 어떤 일을 하기에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합니다(v.7).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고 격려하는 보호자, 우리를 변호하는 변호자라고 말합니다. 또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v.13).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v.13),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v.14),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깨우쳐준다고 말합니다(v.15).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 내주한다고 말합니다(요14:20). 그리고 성령은 죄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v.8).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못 박았습니다. 세상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책망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러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것부터 하나씩 살펴봅시다.
세상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워하고 파당을 짓는 것, 사기 치는 것, 갑질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생명을 해치는 것 등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나쁜 행위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v.9). 세상은 예수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종교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나를 믿지 않는데서 모든 죄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참 엉뚱하지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지요?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 말씀이야말로 진실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죄와 죽음을 이긴 자가 있었습니까? 열심히 도를 닦은 사람, 마음과 인격을 단련하는 일에 힘쓴 사람, 진리를 공부하는 일에 매진한 사람은 많지만 죄와 죽음에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제아무리 도덕적 능력을 개발하고 인격적 훈련을 해도 죽음을 이긴 자가 없는 것처럼, 제아무리 도덕적 능력을 개발하고 인격적 훈련을 해도 죄를 이긴 자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만이 죄를 이겼고, 예수만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역사적 사건이요 진실입니다. 예수만이 죄를 이겼고, 예수만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 죄와 죽음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만이 죄를 이겼고, 예수만이 죽음을 이겼으니까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만이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옳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만이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다른 길은 없어요. 예수만이 길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명명백백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죄와 죽음을 이기는 길이라고 말하면 비웃습니다. 기독교만의 주장일 뿐이라고 폄하합니다. 왜 비웃고 폄하할까요?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얼마나 죄에 대해 무력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겨보려고 별별 짓을 다 해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 해도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죄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얼마나 죄에 대해 무력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들 도덕적인 잣대, 사회적인 잣대로 죄를 판단하는 것이고, 깨끗하게 살아보겠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는데 사실은 훌륭한 게 아닙니다. 저들은 무지와 교만에 갇혀 사는 자들입니다. 무지와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극력 비판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무지와 교만을 깨뜨릴 자는 성령밖에 없습니다. 성령만이 죄를 보게 합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죄, 사람이 보지 못하는 죄를 보게 합니다.
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성실하게 일하는 것, 강도를 물리치는 것, 도둑을 잡는 것 등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선한 행위를 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아버지께로 감으로써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의라고 말합니다(v.10). 이 말씀도 참 생뚱맞게 들립니다. 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씀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언약적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는 일련의 일들이 의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을 끝까지 실행하신 예수님이 의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약을 잘 지키는 것이 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원초적인 불의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불의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담과 맺은 언약에 따른 죽음을 죽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을 때의 그 죽음을 대신 죽었습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담과 맺은 언약을 지키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면서 그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강도를 물리치고, 도둑을 잡는 것을 의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 아담과 맺은 언약을 지키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 의라고 말합니다.
결국 죄와 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관계에 신실하지 못한 것이 죄이고, 관계에 신실한 것이 의라는 말입니다.
이제 심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은 권선징악이라는 차원에서 심판을 생각합니다. 세상의 왕들이나 재판관들이 선한 행위는 칭찬하고 악한 행위는 징벌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백성들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합니다. 세상의 왕들이나 재판관들이 심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고 세상의 왕들이나 재판관들이 심판받은 것이 곧 심판이라고 말합니다(v.11). 다시 말하면 세상의 질서 아래에서 행하는 심판, 세상의 잣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은 심판이 아니고, 이 세상의 질서가 심판받는 것이 진짜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세상의 모든 제국, 모든 권력, 모든 사상, 모든 이론, 모든 질서가 다 무너졌는데 그 무너짐이 바로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심판을 해오셨습니다. 고대 왕국 수메르가 무너지고, 제국 이집트가 무너지고, 앗수르가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무너지고, 헬라가 무너지고, 로마가 무너지고, 진나라가 무너지고, 한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무너졌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론과 진리는 수정되고 비판받았는데 그것 역시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역사를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봅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삼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힘으로써 저들의 심판은 심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 천하에 공포했습니다.
지금까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짧게 살펴봤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은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저 자기들 기준대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돈 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자는 무죄 판결하고, 돈 없고 힘없는 놈만 유죄 판결 받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끝까지 모른다고 발뺌해줘야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줍니다. 수백억 원씩 뇌물을 주고받아도 유력한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법의 보호를 받아야 실력 있고 힘 있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법을 요물딱조물딱 조무를 수 있어야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법 앞에 꼼짝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해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로마와 유대의 권력자들이 죄 없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과 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어둠이 빛을 심판한 겁니다. 불의가 의를 심판하고, 거짓이 진실을 심판하고, 죽음이 생명을 심판한 겁니다. 이것이 세상이에요. 세상은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알고 있다 해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엉뚱한 짓들을 하는 것이고, 또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한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의 무지와 교만을 폭로하고 책망할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죄인지, 무엇이 진짜 의인지, 무엇이 진짜 심판인지를 깨우쳐 알게 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제일 먼저 죄를 보게 합니다. 상식에 가려진 죄, 습성에 젖어든 죄, 어둠에 갇힌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합니다.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죄를 대면해야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죄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잔인함과 교묘함과 죄의 일상성을 깊이 대면하고 자각해야만 회개하고 죄와 싸울 수 있으니까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합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할 때마다 거의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죄의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죄를 드러내고 보게 할 때마다 회개하게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 죄 용서를 받게 하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죄를 이기게 하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를 보면 죄가 사람을 살립니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잣대로 죄를 보면 죄가 사람을 죽이는데 예수님을 통해 보면 놀랍게도 죄가 사람을 살려요. 성령께서 온 세상에 가득한 죄를 보게 하고, 자기 안에 득실거리는 죄와 일상 속에 깊이 스며있는 죄를 비추어 보게 하는데도 죄가 사람을 살려요. 그래서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세상의 모든 생각과 견고한 요새들을 무너뜨립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요새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후10:3-5). 그렇습니다. 성령은 세상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사실 세상은 온통 어둠입니다. 세상이 아는 것은 거의 대부분 잘못된 앎입니다. 설사 옳다 해도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 전적으로 옳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과 지식은 잘못됐거나 일리에 불과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과학 지식도 일리에 불과하고, 수학 지식도 일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에 대한 지식도 다 일리에 불과합니다. 동양에서는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대립해왔는데 성선설도 완전하지 않고 성악설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인간에게 본성이 있느냐 없느냐, 사람의 마음이 하얀 도화지와 같은 빈 서판이냐 아니냐 하는 것 가지고 논쟁을 해왔는데 ‘빈 서판론’(존 로크)도 완전하지 않고 ‘본유관념론’(에드워드 허버트)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것도 프로이트는 원인론적으로 접근했고 아들러는 목적론적으로 접근했는데 원인론적인 접근만으로도 인간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목적론적인 접근만으로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좌우지간 모든 이론과 지식은 다 일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 구원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세계 내 존재이고, 이성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부분적으로 알 뿐이고,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의 무지를 깨달았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내가 어둠에 속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아는 지식을 다 합해도 태평양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고,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빛이 임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보았고, 진리의 영이 임함으로 제 안의 무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둠과 제 안의 무지를 보면서부터 세상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제 안의 무지에서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진이나 쓰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국가경제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다 무서운 재앙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보지 못하고 자기 안의 무지를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한 것이 가장 무서운 재앙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재앙에 빠져 있습니다. 무지와 교만의 재앙에 빠져 있고 갇혀 있습니다. 학교도 이 재앙에서 구출해주지 못하고, 국가도 구출해주지 못하고, 종교도 구출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구출해줍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세상의 어둠을 보게 해주고, 자기 안의 무지를 보게 해주고, 자기 안의 죄성을 보게 해줍니다. 성령님은 마술적인 방식으로 구출하지 않아요. 어둠을 보게 함으로써 어둠에서 빠져나오게 합니다. 자기 안의 무지를 보게 함으로써 무지에서 해방시킵니다. 자기 안의 죄성을 보게 함으로써 죄와 싸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통해 교만이라는 높은 성에서 끌어내리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면 성령을 보낼 것이고, 성령이 오면 너희들의 눈을 열어 세상의 어둠과 자기 안의 무지를 보게 할 것이고, 결국 무지와 교만의 재앙에서 너희를 구출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날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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