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역한 백성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하나님 앞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일치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것이 위기를 불러오고 재앙을 불러오고 비극과 불행과 사망을 낳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이치를 잘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원칙이란 것을 알고
그 원칙 중심의 삶을 살 때 행복과 번영이 온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치와 원칙을 안다고 해도
실제로 삶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유익과 편한 길을 따라가고 만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은데 결국에는 그것이 파탄과 사망을 불러온다.
세상을 통치하는 자는 세상의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뜻대로 사랑과 공의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
세상에 힘있는 사람들 손에만 맡겨 놓았더라면 세상은 벌써 지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였으면서도
그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생각(율법)을 거역하다가 멸망했다.
그들은 그때 그때 자기들의 유익과 탐욕과 쾌락에 대한 자기 생각이 우선이었다.
그들이 40년 동안에 다 죽고 2세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이 죽고 나자 이내 그들은 자기 생각들로 돌아갔다.
사사시대라는 암흑시대가 300년 동안 도래하였다.
이 사사시대 암흑시대가 온 이유를 사사기 마지막 구절은 한 마디로 말씀하고 있다.
(삿 21: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 망하게 돼 있다. 암흑시대가 다가 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살려고 한다.
누구의 얘기도 들을려고 하지를 않는다.
조금 배워도 그때 뿐이고, 지속적으로 배울려고도 하질 않는다.
(베드로는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라고 한다.)
왜냐?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 하나님, 그 왕이 없다.
내가 바로 왕이다. 내가 왕이니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다.
내 왕을 바꾸는 것이 회개이고, 회개해야 천국을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제 일성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야 복과 영광을 주신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산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들이 낱낱이 본문에 나와 있다.
그 죄를 범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한 가지였다.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였다.
-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성전 제단에서 분향하지 않았다.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냈다.
-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내며 신비적인 기도와 쾌락의 밤을 보냈다.
돼지 고기들을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았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는 거룩하다고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 하나님이 복음이 오기 전에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가증한 것들을 먹고 마심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이교의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능욕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모든 패역은 이교의 우상숭배에 빠지며 하나님을 능욕한 것이었다.
현대 교인들이 이 우상숭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동산에서 벽돌위에서 무덤 사이에서 우상 숭배는 아니할지라도
집안에서 마음 속에서 돈에 대해 소유에 대해 가족과 사람들에 대해 권력과 명예에 대해
하는 우상숭배는 구약시대 못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더 악해져 왔으니까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탐욕스럽게 좋아하는 모든 것이 현대판 우상숭배들이다.
내 마음에 신이 바뀌면 그 신의 생각을 따라 그 신이 원하는 길을 가게 돼 있다.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 결과이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 마음에 비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마음에 비쳐져서 거듭나고 새로운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탄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주면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이 아주 극찬하신 신앙고백을 하기까지는 좋았는데,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니까 말리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책망을 듣고서야 생각을 돌이켰다.
우리도 구원 받기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을 따랐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우리가 다시 사탄을 은연중에 우리 마음에 불러들이고,
악한 영이 주는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다. 패역한 백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성경이 권고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이고, 복의 길이다.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니”(롬8:13)
육신대로, 사탄의 생각대로, 살면, 죽기는, 망하기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하여 결코 정죄함이 없지만
죄에 대한 사랑의 징계가 없을 수가 없다.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상급의 심판도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복음 복음 하면서 모든 것이 용납되고 용서되는 것처럼
버릇없는 손자 할아버지 수염뽑는 것처럼 함부로 사는 교인들이 있다.
사랑의 징계는 구약의 심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더할 수도 있다.
징계를 받는 것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10:32)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한다고 했다. 우리부터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순서이다.
(벧전 4:17-18)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죄를 함부로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순종하기 위함이다.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시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은 신약성경의 말씀이다(롬6:23).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는 신약성경의 말씀이다(히12:29).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는 신약의 말씀이다(히12:28).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에 대한 말씀은 오늘 우리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오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를 위해 구약을 포함해서 성경을 66권으로 정하여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임으로 사는 길을 가야 한다.
이 길을 가도록 은혜가 왕노릇하면서 우리를 돕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우리 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죄악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롬 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십자가 복음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면, 저항을 하고 떠나고 만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라”고 하신다(고후10:4).
우리의 “지체를 이제는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고 하신다.
하나님이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듣지를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패망의 길로만 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부르셨다고 한다.
2 이스라엘의 패역이 이방인을 부르게 하였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11장에서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롬 10:20-21)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고 한다.
(롬 11:11-12)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세운 것은 그들만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서 온 나라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만 선택받았으니 구원이 보장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지 않으면,
버림받은 진노의 자식들이 되는 것을 몰랐다.
그들의 패역을 돌이키기 위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세웠지만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 믿는 자들을 통해 택한 자들을 통해 기독교는 세워졌고
그 유대인 사도들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구원계획이다.
이스라엘이 패역하였기에 이방인들을 불렀는데,
이 현대의 이스라엘이 또 패역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는 마찬가지다.
(롬 11:20-22)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우리도 높은 마음을 품고 두려운 마음으로 성결한 삶을 살지 않으면
꺽이우고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인자함이 계속 머물지만
넘어지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함께 보아야 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무게를 달아 부족하면 사망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한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4:1-3)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사명에 충성하지 않으면, 교회는 촛대를 옮기고, 우리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세울 것이다. 세월을 아끼고 내 사명을 알고 사는 데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 주어진 직임에 성실해야 한다.)
3 패역한 백성들 가운데서도 씨를 내고 기업을 주신다.
'야곱에게서 씨를 내고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
남은 자 사상이라고 한다.
(롬 11:4-5) 그(엘리야)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야곱에게서 씨를 내고 다윗에게서 나의 산들(시온)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낸다고 하신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좁은 문으로 가는 씨. 남은 자들을 내고
그 중에서 다윗과 같이 여호와의 기업을 받을 자를 낸다고 말이다.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다.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거라고 하셨다.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13절,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고난과 연단을 받느라 버림을 받은 것 같았던 야곱의 씨들이, 기업을 받는 자들이,
그들의 인생이 역전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영원이 좋으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게으르지 않고 동일한 부지런으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른다고 하였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자.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가는 패역한 자들을 본받지 말자.
야고보 사도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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