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신앙의 '아름다움'(2): 살아있음(생명)의 '아름다움'

새벽지기1 2017. 2. 15. 07:41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본질적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이며 그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에 대한 판단 기준은 장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중세기 미술 작품 속에서 표현된 여인의 ‘아름다움’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미적 감각과는 차이가 있으며, 동양인과 서양인들의 이상적 여인상 역시 동일할 수는 없다. 시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아름다움’이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인 ‘아름다움’ 곧 창조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토브’(좋았더라) 의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살아있는 생명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아무리 고운 자태의 미인이라도 호흡이 끊기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구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은 살아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지, 생명이 끊기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기피대상이 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죽고 나면 곧바로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난다.

 

‘살아있음’은 단순히 숨을 쉼으로 유지되는 생물학적 목숨만은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생명은 영적 거듭남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여기에서 ‘생령’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인데, 살아있는 목숨,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기가 빠진 목숨은 비록 살아 숨을 쉰다하여도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참 생명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남의 참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작은 반사체들이다.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생명의 본질인 성장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의 향기이다.

 

‘살아있음’의 명백한 증거는 성장이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성장이 없는 것은 곧 생명의 부재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10:10), 더 풍성한 생명의 경험, 그것은 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지는 겉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다. 날마다 성장하는 생명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며 행복이다. 성장과 함께 삶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영향력과 보람도 더불어 증대된다.

 

‘살아있음’의 또 다른 증거는 사랑의 향기이다. 살아있는 것은 생명의 향기롭고 상큼한 냄새를 품고 있다. 그러나 죽으면 부패로 인하여 악취를 뿜어낸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우리들이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다(고후 3:15-16). 그것은 생명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로서 형제 사랑을 통하여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유익이다(요일 3:14). 사랑의 향기는 우리 자신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하여 전달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곧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와 복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사랑의 향기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가를 깨우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주인인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는 비유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마 18:21-35). 달란트는 금이나 은을 측정하는 가장 큰 무개단위로서 대략 33kg 정도이다. 일만 달란트는 330톤의 금이나 은에 해당되는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다. 그에 비하여 은전 명칭인 데나리온은 대략 장정의 하루 품값 정도이다. 백 데나리온은 4개월 봉급에 해당되는 액수의 돈이다. 주인이신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용서할 분량은 너무도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억이 구원을 영속시키는 비결’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