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칼빈

상급은 은혜의 선물이지 행위의 공로에 대한 보속이 아니다 / 존 칼빈

새벽지기1 2016. 8. 9. 11:29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는 말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16:27) “우리가 다 반드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2:9-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_36).

 

이와 비슷하게 영생을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말씀하는 구절들도 있다. “사람은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12:14, 311). “계명을 두려워하는 상을 받느니라”(13: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5:12).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라는 사도의 진술은 전혀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이 표현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의 전후 순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고 하는데 주님은 바로 이러한 그의 긍휼하심의 단계를 좇아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것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 백성을 오직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 속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세우신 질서에 따라서 그들 속에서 주님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고자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 생명을 소유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행위에 따라서 면류관을 받으며, 행위로 말미암아 영생의 면류관을 받도록 스스로 준비한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말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신자들은 이렇게 선행에 헌신하는 가운데서도 영생을 묵상하는 법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6:27)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서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6:27)라고 덧붙이신다. 이 사실로 볼 때에, “일하라는 말은 은혜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 노력하라는 뜻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 자신이 자기들의 구원을 이루는 주체라거나, 구원이 신자들의 행위에서 나온다는 식을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부르심을 받으면, 그때에 영생이 그들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였으니 주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그 일이 완전하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1:6). 그러나 그 일이 완전하게 되는 일은 신자들 스스로 의와 거룩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음으로써 자기들이 참 자녀다운 자녀들임을 입증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급은 양자가 받을 기업이다. 천국은 종들에게 주는 삯이 아니라 아들들에게 주는 기업(1:18)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납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업(유산,유업)이라면 오직 주님께서 자녀로 입양하신 자들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요(4:7), 또한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녀로서 입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1:5-6).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4:30). 성령께서는 영원한 영광을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약속하시는 바로 그 구절들에서 그것을 기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심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속이 아니라 다른 근원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여러 가지 행위들을 열거하시고 택한 자들을 불러 그것을 차지하라고 하시면서(25:35-37), 동시에 그 상급을 상속받으라고 덧붙이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25:34).

 

바울도 종들에게 자기들이 맡은 임무를 성실한 마음으로 행하라고 하면서 이에 대해서 주께서 갚아주실 것을 말씀하는데, 이때에 그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라고 덧붙이고 있다(3:24). 성경은 이처럼 명확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복락을 우리의 행위의 덕분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사실 덕분으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나라가 그 안에서 복을 받게 될 씨에 대한 약속을 받았었다. 아브라함은 창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므로 동일한 축복을 받는다(15:5,17:1.18:18).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받았던 약속의 축복을, 그 명령에 순종하여 공로를 세워서 비로소 받았는다는 뜻인가?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는 행위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주신 축복들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시므로, 여전히 주님의 긍휼하심 이외에는 신자들이 축복을 얻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 이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행을 통하여, 그가 약속하신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혹은 열매 맺는 것을 묵상하도록 하며, 또한 그리하여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들에 대해 복된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약속들의 열매가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지도록 하셔서, 그 열매가 익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소망을 위하여 사랑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말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상을 멋지게 표현한 바 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1:5).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쌓여 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가운데서, 사도는 그것이 행위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임을 선포한 것이다. 또한 경건한 자들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5)는 베드로의 말도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상급이 결국 공로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포도원을 경작하기 위하여 품꾼들을 찾으러 보내는 포도원 주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저녁이 되어 그들에게 모두 똑같은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다(20:1-16). “제 십일 시에 포도원을 보냄 받아서 온 종일을 밭에서 수고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삯을 받은 사람들은 날이 저물 때에, 즉 그들의 생명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상급을 받는 자들의 운명을 나타내는데, 주님은 이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훌륭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온종일 땀을 흘리며 수고하였으나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이 자기들이 수고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옳은 것이다.”

 

상급을 행위에 대한 보속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상급이 영생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진술을(벧전1:9) 다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우리의 행위들이 상급을 받기에 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령께서 이런 약속을 해 주셔서 우리의 행위들의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높일 아무런 이유도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의 목표는 우리의 교만을 억제하고 우리를 낮추며 우리를 숙이게 하고 우리를 완전히 납작하게 누르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도움을 받는다.

첫째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각자 생각해 보라.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즉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시는 것이 바로 이 교훈이다.

둘째로, 주님은 그들이 평생토록 십자가의 훈련을 받아 이 땅의 것들을 바라고 기대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그들을 연단시키신다. , 주님은 그들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서 온통 절망밖에는 보이지 않도록 그렇게 그들을 다루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한다. 그들이 이런 크나큰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 실족하지 않도록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더 높이 들고 시선을 더 멀리 향하여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는 복락을 그리스도 안에 바라보도록 그들을 경계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 복락을 가리켜 ”, “상급”, “갚으심이라 부르신다(5:12,6:1이하). , 행위의 공로를 높이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불행과 환난과 비방 등을 그렇게 갚아 주신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전례에 따라서(고후6:13,10:35,11:26) 영생을 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수고하던 데서 쉬는 데로, 환난과 괴로움에서 복되고 즐거운 상태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궁핍에서 풍부로, 치욕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영접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이 당한 온갖 악한 일들을 주께서 더 큰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하더라도 아무런 잘못이 없을 것이다. , 여기서 길이라 할 때에 그 거룩한 삶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해주는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택한 받은 자들이 그 거룩한 삶을 통해서 그 나라의 영광이 나타나는 데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거룩하게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기 때문이다(8:30).

 

궤변가들은 공로와 상급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식의 고집을 늘어놓지만, 우리로서는 공로와 상급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부르시는데 그것 말고 다른 곳을 향하여 두리번거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위로를 통해서 우리 육체의 연약함을 덜도록 선행에 대하여 상급을 약속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우쭐해져서 허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상급을 근거로 행위의 공로를 유추해내거나, 행위와 상급을 서로 재거나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계획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78-384

(청교도의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