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남준목사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 김남준목사

새벽지기1 2016. 6. 10. 10:21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6)

1. 서론
  :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사건이 묶여서 나온다.
 
이 두 사건은 일어난 시간은 다르지만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이 두 사건이 교회에 주는 의미와 교훈을
묵상하고자 한다.

2. 본론

1) 예수님의 통곡의 이유

-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시다가 예수님이 갑자기 우셨다. 여기에서 ‘울다’는 헬라어 ‘클라이오(klaivw)’인데, 이것은 ‘큰소리로 울부짖다’ 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셨던 이유를 성경은 성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여기에서 ‘보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이도(eijdw')’인데, 이것은 그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통찰로 보신 것을 의미한다.

-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를 우리는 예수님의 독백에서 짐작하게 된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40년 후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성은 이후에 로마에 의해 모든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전대미문의 기아 상태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로마에 의해 전 도시가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은 신적 통치의 상징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불렀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람들과의 화목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내적이고 외적인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평화를 말한다.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이르샬롬’ 즉, 평화의 성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2)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게 가리어졌던 하나님의 심판

- 그런데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려져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많은 특권을 베푸신다.

그리고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잘 활용할 때는 교회도 개인도 영적인 눈이 뜨여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있을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이요, 하나님의 뜻을 가장 많이 보여주신 성이었다. 죄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소가 있었고, 제사장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 주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도시들이 잠들어 있어도 예루살렘은 그 모든 특권들을 가지고 깨어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도시들을 깨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3) 교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랐고,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지 몰랐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일이었다.

그것을 누군가가 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는 상태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

-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고 알리는 존재로 하나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것이다.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온갖 신령한 지혜와 모든 목양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보여주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수단들이다.

4) 그들의 눈을 가리웠던 불결함

-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심판이 가려졌던 이유를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 이르신 예수님은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이들의 상을 뒤엎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이것의 원문은 “왜냐하면 나의 한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뜻은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만민을 위해 선택된 백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보복이 아니라 정화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이 정화시켜야 할 정도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패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정화의 일을 하신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원래 제사는 자기가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나와서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는데, 먼 곳에서 제물을 가지고 오기 힘들었기에 성전에 와서 물건을 사듯 제물을 샀고, 명목가치와 실제가치가 달랐던 희랍돈과 로마돈을 히브리돈으로 바꾸어 연보를 했다.

이러한 제도 사이에 어떤 치부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는 말씀으로 그러한 제도들 사이에 존재했던 인간의 탐욕을 보이셨다.

-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고, 그 평화를 전하고, 이 땅의 만민을 위해 기도하며 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기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자기 안에 있는 불결함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어둡게 하고 순결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3.결론 : 눈물로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라

-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평화를 회복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의 눈물을 먼저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섬김, 기도하지 않는 야심 찬 계획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와는 먼 사람들이 되게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있는 죄와 순전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먼저 우리 안의 죄와 불결을 끊고 버릴 때 기도의 항해가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

이 교회는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이렇게 순결함을 가지고 이 땅의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