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몸에 대한 소중한 신학(2)

새벽지기1 2016. 3. 31. 15:06


샬롬! 찬미예수

 

형님!

 

육신의 고통과 불편함에도 우리의 만남으로 풋풋한 정들이 묻어나고 피차 염려하는 모습들을 보며

마음들이 더욱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늘 평안과 강건함으로 남은 삶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잘 경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건강의 문제가 우리에게 화두가 되고 늘 상존하겠지만 심령의 부흥과 평안은 놓칠 수 없습니다.

누구나 건강의 문제가 여의치 않겠으나 큰 문제 없이 이제껏 비켜가고 이만 할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무엇보다 속히 치료되어 봄 기운의 활력과 영의 충만함을 다시 한 번 크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몸에 대한 소중한 신학을 정립하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성경에서는 몸(육체)이라는 것은 죄의 원리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는 말씀과 같이 영원한 가치가 없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6:16-17)

 

이와 같이 성령님과 육체를 대비하는 것은 불신자일 때, 자연인 일 때, 죄인으로 태어나는 구원 얻기 이전의 인간이

가지는 속성과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과 생각과 얼마나 상반되는가를 나타내는 단어로써 육체라는 것을 쓴다.

그리스 사람이 생각하는 것 같이 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 이런 이원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거듭나기 전의 그의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을 대표적으로 얘기할 때 육체라고 한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나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이러한 말씀은 바로 불신자인 자연인의 삶의 원리를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우리의 몸 자체, 혹은 자연계와 물질계를 부정하고 욕하는 표현들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 불신자,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불순종의 원리와 성품을 대표하는 단어로 육체라고 쓴다.

좀 더 큰 의미로 쓸 때는 세상, 혹은 세대라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사실 인간의 죄라는 것은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성향으로부터 시작된다.

죄는 오히려 가장 좋은 환경, 최고의 환경인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죄의 원리는 사람 속에 있지 환경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을 불복하고 반대하는 자기의 욕심과 마음속에 쫓아다니는 하나의 경향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담을 쌓고 기도원에 들어가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착각한 것이 중세시대의 큰 시행착오였다. 세상과 단절하고 살면 거룩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때는 세상과 단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채찍질해서 이 금욕에서 자학으로까지 갔지만

중세 시대의 수도원이 성공한 예가 드물다.

 

린도 교회의 문제는 이보다 더 나갔다.

저들은 형이상학적인 내 정신과 사상이 형이하학적인 죄와 물질계에서 해탈했다고 여기며

이쪽은 벗어버린 내 껍질이고 허물이고 그림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초월해 버렸으니 아무려면 어떠냐?

남은 것은 다 허구요, 껍질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이 구정물에 있은들, 시궁창에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고는 별짓을 다 하며 '자유'를 잘못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영지주의나 지금의 구원파와 비슷한 종류의 이단 사설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지금 주를 믿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으로 너희 몸을 어디다 바치고 있나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피묻은 자유를 값싸게 잘못 오해하고 있는 문제였다.

우리의 소중한 몸 자체를 괄시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내 정신이 누구를 좇고 있느냐를 보며

죄로부터 자유인 것임을 몸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from sin)이지, 죄에 대한 자유(to sin)가 아닌 것이다. 

 

몸의 신학은 인간의 몸과 사랑, 성, 생명, 혼인, 가정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혁명적 혜안,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서구 이원론과 합리주의 사상이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대비시키는 것과 달리 몸의 신학은 둘을 단일체로 바라본다.  

예수님이 몸을 버리고 영혼만 가신 것이 아니라 그 몸이 부활하셨듯이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이다. 

신령하고도 거룩한 부활의 몸으로 홀연히 변화할 그 날을 기대하며 우리의 몸을 잘 건사하는 삶이 아름답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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