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하나님 나라(30) -신학의 역할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9. 05:32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흥미를 보이고 있다. 전문적인 신학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교사가 되어서 이 흥미를 유발시켜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문제들에 관해 독자적이고 성숙한 차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모든 판단은 목사나 신학자의 도움 없이도 내려진다. 그러나 직업적인 신학자의 일은 공동체가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성숙한 방법으로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학자가 한 교구 목사인 경우에 그는 이 책임을 수락함으로써 자기가 자기의 학문적 연구를 이용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목사인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전문교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활동에 그들의 지적 기능을 낭비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점들과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더 그들은 설교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6 쪽)

 

     그대는 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국교회의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신학은 신앙생활에서 쓸모가 없소. 신학 무용론의 뿌리가 너무 깊소. 신학은 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일 뿐이지 교회 현장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소. 신학교 채플에 주로 초청을 받는 설교자들은 교회를 부흥시킨 이들이오. 그들은 신학생들에게 신학 공부보다 기도와 목회 열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쏟아낸다오. 신학생들도 신학에 별로 진지하게 않소.

 

     하기야 한국교회에서는 전문적인 신학 없이도 얼마든지 목회를 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소. 기껏해야 큐티 수준의 영성으로 굴러가고 있으니 더 이상 신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이런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라오. 착각 정도가 아니라 영성의 황폐화에 이르는 지름길이오. 왜 그런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겠소? 한 가지만 예를 들겠소. 어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중요한 문제이니 다시 말하겠소.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축자영감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소. 성서가 문자의 차원에서 무오하다는 확신이오. 이는 마치 로마가톨릭 신자들이 교황무오설을 믿는 것과 비슷하오. 어느 신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지 않소.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사람을 절대화하고, 개신교는 성서라는 종이를 절대화한다고 말이오.

 

     위의 글에서 판넨베르크는 목사를 전문적인 신학자라고 보고 있소. 목사는 당연히 그래야만 하오. 목사의 역할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오. 이럴 때 평신도들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 자신이 판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거요.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신학적인 접근을 해야 하오. 오늘 한국의 목사들은 평신도들이 신학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소. 불행한 사태요. (2010년 6월8일, 화요일, 햇빛과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