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옥중서간(16)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7. 07:21

'여기서 종교적 방법론이 문제는 아니다. 종교적 행위는 부분적인 것이다. 신앙은 전체적인 것, 즉 생명 행위(Lebensakt)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로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삶(생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런 삶은 어떤 것일까? 이런 삶은 이 세상에서 신의 무능력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오늘은 다음의 것만 추가하겠다. 신에 관해서 ‘비종교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세상의 무신성(無神性)을 은폐시키는 게 아니라 차라리 폭로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놀라운 빛이 세상을 비추도록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인이 된 세계는 성인이 되지 않은 세계보다 무신성이 더 깊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성인이 되지 않은 세계보다 더욱 신께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너무 어렵고 표현도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용서해 주기 바란다. 최근에 우리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새벽 1시까지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정말 견딜 수 없고, 정신노동에도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본회퍼, 옥중서간, 227 쪽, 1944년 7월18일)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해서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중세기에는 신 존재 증명이 유행을 타기도 했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오. 최고 존재자나 부동의 동자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이오. 이런 논리들이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똑같은 무게의 반대 논리가 성립하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지 않소. 시도할 수도 없소. 무신론에 대한 니체의 주장이 나온 뒤로는 그런 신 존재 증명은 마치 천동설과 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말았소. 유신론적인 접근이 토대를 잃었다는 말이오. 위에서 본회퍼가 말하는 세상의 ‘무신성’이 바로 그런 사태를 노골적으로 말하오.

 

     본회퍼는 이 세상의 무신성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소. 무신성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이 신 없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충만하다고 믿는 그대에게 무신성이라는 말은 해괴하게 들릴지 모르겠구려. 정신 차리고 잘 들으시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시오. 이 세상에는 무죄한 이들이 고난을 받고 있소. 악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오. 하나님이 통치한다면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소. 이런 문제가 기독교의 신정론에 들어 있소. 본회퍼가 말하는 무신성은 이것과는 약간 다른 뜻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관점이오.

 

     위에서 짚은 것처럼 본회퍼는 이런 무신성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오. 하나님의 무능력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 증거로 받아들이오. 중세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오. 하나님의 실패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는 거요. 이것을 말장난처럼 보면 곤란하오. 하나님을 인간의 종교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뜻이오. 하나님에게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투사시키지 말라는 뜻이오. 무신성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요. 오해는 마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런 무신성에 빠져서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에 흘러가도 좋다는 말이 아니오. 그 반대요. 본회퍼는 신앙을 가리켜 ‘생명 행위’라고 하오. 그게 무엇이오? 그대 스스로 더 생각해보시구려.(2010년 6월2일, 수요일, 지방선거가 있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