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인생의 전환점 (창 28:10-22)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6. 2. 02:22

해설:

저자는 5절에서 야곱이 집을 떠나 하란에 도착했다고 보도하고는 10절에서 하란으로 가던 길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서술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야곱의 심정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쌍둥이의 둘째로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한계에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인생 역전을 위해 노력했고, 어머니의 분별력 없는 행동으로 인해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외가댁이라곤 하지만 그는 이제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는 낯선 광야에 내 몰린 것입니다. 하란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고 그의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인해 복잡했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란으로 가던 어느 날, 저녁이 되어 장막을 펴고 잠을 청합니다(10-11절).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학자들은 머리 주변에 여러 개의 돌로 보호막을 치고 잤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해석합니다. 야곱은 피곤에 지쳐 깜빡 잠에 드는데, 잠자는 중에 그는 신비한 꿈을 꿉니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층계(개역개정에는 ‘사다리’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새번역처럼 ‘층계’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가 놓여 있고 그 위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12절). 그 층계 꼭대기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자신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13절)으로 소개하면서 야곱이 가는 길에서 그를 지켜주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십니다(14-15절).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16절)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17절)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눈 뜬 것입니다. 그는 동이 트기까지 누워서 꿈에서 본 광경과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평안이 깃들었을 것입니다. 

동이 트자 마자 야곱은 돌 하나를 세워 제단으로 삼고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립니다(18절). 그곳의 이름은 원래 루스였는데 야곱은 ‘베델’이라고 이름 짓습니다(19절).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께, 앞으로 가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 주시면 주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것이고 베델에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20-22절). 거래와 흥정의 명수답게 야곱은 하나님께 일종의 흥정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여 즉시로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빚어지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많은 고난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라반의 집에서 야곱이 겪을 일입니다. 

 

묵상:

1.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의 하나님”이신 분을 예배 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나님이었지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쌍둥이의 둘째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께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배했던 하나님은 그의 삶에 방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술수와 수단으로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노력은 그의 인생을 한 없이 꼬이게 만들었고 결국 낯선 땅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야곱이 범한 잘못에 대해 하나님은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과 리브가가 이삭을 속여서 탈취한 맏아들의 권리를 하나님이 그대로 승인하십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우리의 도덕적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를 축복을 해 주신다 해도 먼저 그의 잘못에 대해 꾸중하시고 책임을 물으셔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이렇게 생각이 되었다면, 우리는 ‘큰 아들 멘탈리티’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아버지의 그 행동에 대해 탕자의 형은 격분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이고 싶었다면 먼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잘못에 대해 책망하고 응분의 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아들 멘탈리티’는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

야곱은 이 꿈을 통해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워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처음으로 참다운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참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배워 알았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직접 대면하는 경험, 말입니다. 그 경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황홀한 영적 체험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을 읽는 중에 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창가에 비치는 햇살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오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눈 뜨는 일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다는 사실 그리고 내 삶이 그분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에 눈 뜨는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낯선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2천 년 전 유대 땅에 살았던 한 청년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뜨고 나면 내가 선 자리가 바로 천국이고 내가 숨 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면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 믿음만이 우리의 존재를 참되게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속속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여러가지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그런 변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