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다시 부활에 대해서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18. 04:00

그대는 어제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셨소?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하루였을 것이오. 혹시 늘 그렇고 그런 또 한 번의 부활절은 아니었소? 어떤 사람에게는 부활절이 행사가 있는 절기로 각인될 거요. 웬만한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성가대 공연이 있소이다. 나도 젊었을 때 부활절과 성탄절에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한 탓에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소. 준비하기 위해서 몇 달은 고생해야 할 거요. 어떤 모임이고 행사가 없을 수는 없소. 그렇지만 행사를 위한 행사로 떨어지는 것만은 피해야 할 거요. 이번 부활절이 부활의 생명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계기였기를 바라오.

 

한 가지 물읍시다. 부활의 주님이 왜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거요? 예루살렘 성전이나 저자거리에 부활의 주님이 공개적으로 나타나셨다면 그 어떤 사람도 주님의 부활을 부정하지 못했을 거 아니오?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오.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지 말고 계속 세상에 남아 계셔서,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나타나셨듯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나타나신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거요. 주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오?

 

내가 늘 질문만 하고 뭐 하나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게 없다는 그대의 불평이 들리는 듯하오. 미안하오이다. 딱 부러지는 대답을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오. 그걸 알지 못하니 어쩌겠소.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뭔가를 찾게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구려. 우리는 지금 스무고개를 하는 중이라고 말이오. 아닌 것을 추려 내다보면 결국 참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거요. 그러니 너무 조금하게 생각하지 말고 진도나 나가봅시다. 죽을 때까지도 이런 질문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오.

 

위의 질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설명을 듣지 않으면 그대가 잠을 설칠지 모르니 내 조금만 말해보리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요. 사람은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오. 또 모든 것을 똑같이 인식하는 것도 아니라오. 다 제각각이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인식할 수 있소.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제한된 현상이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었을 거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것과는 다르오. 지금 우리의 세계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오. 인류 역사에서 유일회적으로 그에게만 발생한 사건이라는 말이오. 그것의 실체는 지금의 시간과 공간 구조가 끝나는 종말에 가서야 확인될 수 있을 거요.

 

부활이 종말론적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오? 상관이 있소. 결정적으로 상관이 있소. 종말론적인 사건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삶의 토대요. 왜 그런지를 설명해 달라고 하지는 마시오. 이렇게만 말하리다. 죽음의 순간이 오늘 살아있는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힘이라오. 판넨베르크의 용어를 빌리면, 미래의 힘이 오늘을 결정한다오. 부활을 꿈을 꾸며 편안히 잠을 청하시오. (2010년 4월5일, 월요일,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까지 경치 좋은 용인에서 즐겁게 지낸 날, 점심은 세 사람이 오리 백숙으로 먹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