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무덤에 묻히시다(막15:42-47)

새벽지기1 2024. 3. 31. 06:34

해설:

모든 일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운명 하셨고, 그분을 조롱하던 군중과 유대교 지도자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날은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 예비일 즉 오늘로 하면 금요일 오후였습니다(42절). 해가 떨어지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산헤드린 의원 중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마가는 그를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43절)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의회에서 예수님을 신문하고 판결을 내릴 때에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형을 막을 수는 없었으나 그분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해가 떨어져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마가가 언급한 것처럼 “대담한”(43절) 행동이었습니다. 정치범으로 처형 당한 사람들의 시신은 처형된 상태로 두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고, 그런 사람의 시신을 요구하면 같은 편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든 풀어 주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를 냅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산헤드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도 요셉을 돕습니다(요 19:39).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44절)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보통 2-3일 혹은 일 주일 정도 고통 당하다가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십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시켰고(45절), 빌라도는 요셉의 청을 허락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바위 무덤에 안치하고 입구를 돌문으로 막아 놓습니다(46절).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 본 여인들은 멀리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 봅니다(47절).

 

묵상:

서양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을 Good Friday라고 불러 왔습니다. 사실, 이 날은 Bad Friday 혹은 Worst Friday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무고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날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이유는 옛날 영어에서 good은 holy와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Good Friday는 Holy Friday와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말로 ‘성금요일’이라는 번역은 아주 잘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 교회 전통은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신 날을 Black Saturday라고 불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는데 그 빛이 잠시 꺼졌으니, 암흑의 날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검은색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Holy Saturd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장사되고 난 다음, 제자들은 하루 반 동안 철저한 절망감 속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난 후에도 혹시나 이적의 능력으로 떨치고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되었다는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해 듣고 그들은 모든 소망을 내려 놓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무겁고 깊은 침묵 가운데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마음에는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고, 동공은 죽은 사람처럼 비어 버렸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그런 때를 거칩니다. 눈 앞이 깜깜해지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끝도 없이 아래로 꺼지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 ‘내일 눈이 떠지지 않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시간을 거쳤습니다. 우리는 사흘 만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해 주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처형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는 이틀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무한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지옥과 같은 시간을 거쳐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그분 안에서 다시 희망을 찾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