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예수님은 앞서 회당에서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고, 이제 시몬의 집에서도 역시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보도 앞에서 지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과연 이런 보도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으로 묘사된 이런 보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신화 자체에 묶이지 말고 그 신화의 실존론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에서 실존만 건지고 만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 신앙이 살아 움직이는 이 역사의 리얼리티는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단군신화에도 실존론적 의미가 있으며, 동학혁명에도 실존론적 의미가 있는데, 굳이 그리스도교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요. 우리는 인간 실존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적 현실을, 굳이 그쪽의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실존을 성서 텍스트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귀신을 내쫓았다는 이 보도에서 일단 ‘귀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따라가 봅시다. 헬라어 성서는 32,34절에 나오는 귀신을 영어 demon에 해당되는 ‘다이몬’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23절의 귀신은 영어 spirit에 해당되는 ‘프뉴마’를 사용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이 귀신이라는 뜻이지요. 참고적으로 루터 번역을 찾아보았습니다. 루터는 34절의 많은 귀신을 “viele böse Geister”라고 번역했고, 23절의 더러운 귀신을 “ein unsauberen Geis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 번역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각각 “많은 나쁜 영들”, “한 더러운 영”입니다. 헬라어 성서는 다이몬과 프뉴마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한 반면에 루터 성서는 ‘가이스트’만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독일어 가이스트가 그만큼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만큼 단조롭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일까요?
독일어 Geist는 ‘영’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정신’으로도 번역됩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Phänomenologie des Geistes>라고 합니다. 성령은 “der Heilige Geist”이지요. 참고적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phenomenology of mind>라고 영역되었는데, 독일어 Geist를 mind로 번역되는 건 바르지 않다고 합니다.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에서 폴 틸리히는 독일어 가이스트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대문자 Spirit으로 한다고 설명하더군요.
다른 이야기가 너무 많았군요. 위의 언어 문제를 전제하고 볼 때 우리는 귀신을 ‘악한 정신’으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정신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 나타나는 차원이 아니라 최고의 영적인 능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서 하나님은 곧 ‘절대정신’이거든요. 이에 반해서 인간은 상대적인 정신이겠지요. 양쪽 모두 정신이라는 사실은 일단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 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여기서 바른 정신은 단순히 순수이성, 또는 실천이성이라기보다는 궁극적인 생명의 리얼리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식하고 신뢰하는 우리의 영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물론 귀신이 실체와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런 좁은 의미로만 보는 건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훨씬 심층적인 의미에서 귀신은 더러운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 앞에서 그런 세력은 무능해집니다.
주님, 바른 정신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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