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예레미야서 23장: 주님께 부담이이 된 존재

새벽지기1 2021. 10. 24. 06:34

해설: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비유를 사용하여 유다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는데, 그들은 양떼를 돌보는 책무를 소홀히 했습니다(1-2절). 주님은 친히 목자가 되어 흩어진 양떼를 다시 찾아 목장으로 데려 오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3-4절).

 

그 일은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서 “의로운 가지”가 돋아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왕은 이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에게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5-7절). 이것은 후에 나타날 왕에 대한 예언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편으로는 거룩한 주님의 말씀 때문에 속에서 불이 타는 듯한 고통을 받고, 다른 한 편으로는 유다 땅에 퍼져 있는 죄악으로 인해 고통 받습니다(9-10절).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지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더니, 유다의 예언자들도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주민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유다의 죄악이 예언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11-15절). 주님은 자칭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으면서 주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두둔하고 위로해 줍니다(16-32절).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물어 오면 그들이 주님에게 부담이 된다고 답해 주라고 하십니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자신들을 꾸짖거나 심판하겠다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이유는 그 죄악에서 돌이킬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마음도 없으면서 혹시나 자신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유다 백성을 심판 하겠다고 하십니다(33-40절).

 

묵상: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부담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늘 우리의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높은 이상을 제시하면서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힘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부담 주려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잘 되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선의를 믿으면, 그분의 말씀이 짓누르는 부담이 아니라 힘 솟게 하는 부담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 입어 그 부담감을 기꺼이 끌어 안고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고 우리의 욕망이 강해지면 그분의 말씀은 짓누르는 짐이 됩니다. 예수께서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고 하셨을 때, 그분이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율법의 짐에 짓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 짐을 벗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기를 좋아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삶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에게 혹시 주님께서 “부담스러운 말씀”(개역개정 “엄중한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지 묻곤 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이 그들에게 짐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 짐이 되어 버렸다고 하십니다. 

 

한 때 이스라엘은 주님에게 기쁨이었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주님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심판을 피할 궁리만 하지 회개하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