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 방식에서, 예수께서 수가성에 사는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구절처럼 걸림 돌이 되는것은 없다.
어떤 사물 들을 설명하려 할 때에 사고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설명이나 사고를 시작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때에는 상상해 보러고 애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사설을 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없다. 우리 인격 어느 부분에 우리의 영혼이 거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대충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영계(spirit-world)와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악한 천사들 뿐만 아니라 좋은 천사들도 육체를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모양이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천사들을 알아 볼 수 없다. 천사가 존재하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병들어 누워 있는 침실에 수많은 천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천사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천사가 어떤 형태의 옷도 입지 않은 단순한 영으로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마찬가지 경우인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육체와 격리된 채 단지 영적인 상태로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 전혀 상상해 볼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할 때에도 이와 똑같은 장애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눈으로는 하나님 역시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영이시며 영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의 평범한 지식과 발견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찾거나 만날 수 없게 된다.
우리 영혼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 만남은 임마누엘 안에서 성취된다. 외국 땅에서 우리가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갑자기 본국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국어란 우리와 고국의 친구들과 지닌 공통적인 것이어서 외국어로 말하기 보다는 공용어를 사용함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훨씬 가까워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 인간은 동물들과도 동질감을 느끼며 친하게 지낸다. 고등 동물들은 높은 차원의 지성을 가지고 사람에게 접근한다. 예를 들어 양과 양치는 사람, 사냥꾼과 그가 기르는 개 또는 말 타는 사람과 그가 길들인 말의 공동생활을 살펴 볼 때에 매우 놀라울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우리가 어떤 동물과 아무리 가까이 지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동료와 사권을 가지면, 금방 또 다른 그리고 훨씬 더 풍요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같은 살, 뼈 고리고 영혼을 가진 인간끼리의 만남은 어떤 애완동물이라 할지라도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 자신과 똑같은 생각과 목적을 가진 사람과 교제할 때에 특히 더 그렇게 된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집단, 계급,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와 알고 친해져서 서로 스스럼없이 마음을 터놓고 교제하고자 한다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그룹 똑같은 부류에 속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인생의 항해에서 우리와 똑같은 배를 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인 것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손수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우리의 언어 의식세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신에 대한 상상력을 도와 줌으로써 우리 인간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게끔 해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의 모양을 취하시고 :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 본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과의 교제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변화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 것이 아니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그분께 끌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후에 우리를 자신께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에 들어오셔서 인성을 취하시고 평범한 사람의 본성을 입고 말구유에 누워 계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무너지게 된다. 우리 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인성을 취한 분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인간의 말인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이 하는 행동들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런 것들 배후에는 알려지지 않은 총명과 신비스러운 고상함, 그리고 명백한 거룩함이 반짝거린다. 그런데 그것은 인성을 지니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기 때문에, 거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매혹하며 황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마누엘의 인성은 아주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것들을 가려주는 단순한 막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자연스럽고 친밀하게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도록 하는 수단이요 도구인 것이다.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인간 본성이 예수 안에 있는 인간 본성과 동일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무력해지고 타락한 상태에서는 단지 거룩한 은혜의 선물만이 그 간격을 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인성이라는 부수적인 옷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산 사실, 즉 임마누엘인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도 그것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단언하고서 인간의 모양을 좇아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는 주님의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어 새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안에서 홀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우상 숭배와 이교주의에서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시편과 찬송가에 그토록 영광스럽게 표현된, 살아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참되지 않는가?
임마누엘을 떠나서는 단지 하나님에 관한 철학이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또는 기껏해야 우상 숭배와 냉담한 자연신론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임마누엘을 통해서만 그리고 임마누엘 안에서만 생명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충만한 열정과 고양, 그리고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임마누엘 속에서 우리 인간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 그리고 임마누엘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이 인간성으로부터 영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임마누엘에 거한다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경과이다. 임마누엘은 예수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로 끝난다. 그때에 여러분의 영혼에는 예수께서 말씀(요 16:26)하셨던 날이 밝아온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그때 예수께서 승천하시기까지는 오실 수 없었던 보혜사 성령의 충만한 활동이 전개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인공적이거나 인습적인 요소를 가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케 했음으로 우리가 감히 다시 그분께 갈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본성을 취하신 신성은 우리가 다시 그분께 가까이 가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분의 말씀, 그분의 생각을 드러내 주는 이 세상, 주님의 사역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 내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천국 능력의 공급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더불어서, 은밀한 영적 활동의 원동력은 우리 하나님과의 인격적 접촉, 죽 실제적인 교제인 것이다. 그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욥과 더불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사람을 대하듯 친밀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로 지었던 야곱과 같이 말이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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