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명혁칼럼

초대교회의 완성자 어거스틴 (6)

새벽지기1 2021. 3. 26. 07:20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밀란으로 온 것은 바로 암브로스 감독에게 온 것이었다.” (참회록, 5권 13장 23절).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러가지 요소와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는 여러가지 도움들이 필요했다. 암브로스, 모니카, 폰티키아누스, 알리피우스 등이 그런 도우미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자기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개종의 상황을 그의 참회록에서 계속해서 생생하게 기록했다. 참으로 귀한 참회와 개종의 고백이다.

“개종” (하나님의 품으로)(2)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죄의 포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내일내일 하여야 하는가?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나는 왜 이 순간에 나의 추한 죄를 청산하지 않는가?’ 나는 내내 울면서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눈물로 쏟아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는 근처 어떤 집에서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노래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모르겠으나, ‘집어서 들고 읽어라, 집어서 들고 읽어라’ (Tole, lege, tolle, lege. Take it up and read it, take it up and read it)는 후렴이 계속 연거푸 들려 왔습니다. 그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노는 어떤 게임이 있었던가 하고. 그러나 전에 그런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펴서 내 눈이 처음으로 머무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전에 안토니(Anthony)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봉독 시간에 우연히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그와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는 당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그 곁을 떠날 때 바울서신이 수록된 책을 내려놓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책을 움켜 쥐고 폈습니다. 나는 조용히 내 눈이 처음으로 닿는 곳을 읽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 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구절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는지 혹은 다른 것으로 표시했는지 하여간 표시해 놓고 책을 덮었습니다. 알리피우스에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했을 때, 내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에게 일어난 바를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읽은 구절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얽었던 것보다 더 읽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는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통해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나와 달랐고 나보다 나았습니다. 그는 아무 불안함이나 주저함이 없이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내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에 겨워 당신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만큼 충분한 능력, 아니 그보다 더 넉넉한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당신께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사모하거나 이 세상에 애착을 두지 않게 되었고 다만 신앙의 규칙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여러 해 전에 이미 내 어머니에게 꿈을 통하여 내가 신앙의 규칙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어떤 숙원이 이루어질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내 몸에서 날 육체의 자식들에게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기쁨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참회록, 8권 12장 28-30절).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옛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때는 주후 386년 8월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자기의 개종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없이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 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된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질서론 De Ordine, 2권, 20장 52절).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눈물의 회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개종(conversion)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고 또 말해도 부족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개종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한다. 그는 고행과 선행과 의식과 신비주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노력했다. 그러던 중 1514년 가을 어느날 비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에서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개종을 체험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시22:1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과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 대신, 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끊어버림을 당했구나!”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찬 구주의 모습이었다. 루러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