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반대는 나눔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면 탐욕이 없어집니다.
미움의 반대는 사랑이듯이 내 안에 찾아온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다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주 안에서 주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에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죄악의 뿌리, ‘탐욕’
오늘 말씀은 십계명 중에 열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종이라든지 남종이라든지 소나 나귀 같은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훔치는 일들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탐욕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든지 흔히 짓고, 쉽게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마귀의 계략이 숨어있습니다. 마귀는 탐욕의 문제를 가장 뒤늦게 깨닫게 하고 그저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탐욕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영적 상태로 스스로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바로 탐욕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은 죄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죄책감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탐욕이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한다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탐욕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열정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만족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탐욕이 매우 무섭고 위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권력 투쟁, 경쟁, 싸움의 밑바닥에는 탐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즈니스맨들에게 탐욕의 영이 들어가게 되면 남의 것을 빼앗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인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나만 돈 많이 벌면 되니까. 나만 인기를 가지면 되니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잉태된 탐욕, ‘사망에 이르는 죄’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나서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약 1:15). 잘 살펴보면 욕심은 잉태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누군가 밖에서 인간의 마음 가운데 씨를 뿌린 것입니다. 단순하게 눈을 통해서 물건을 보고 ‘저 물건 갖고 싶다’고 탐욕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 가운데 탐욕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임신을 하듯이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잉태된 것입니다. 그렇게 잉태된 탐욕이 때가 되면 해산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점점 자라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죄는 무럭무럭 쉬지 않고 자라는 것입니다. 씨앗 같던 죄가 나중에 패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로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그래서 죄의 씨앗이 무서운 것입니다. 결국 죄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탐욕을 미리 막을 수만 있다면 도둑질 하고 거짓말 하고 간음하는 죄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탐욕의 열매가 바로 도둑질 하고 거짓말 하고 간음하는 죄입니다. 이러한 죄의 뿌리는 탐욕입니다. 사탄이 인간의 마음에 욕심이라는 씨를 먼저 뿌리는 것입니다. 만약 드러내놓고 살인을 심었다면 살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눈에 보이게 큰 죄를 지으라면 안 짓습니다. 그런데 욕심이라는 작은 씨를 뿌려서 그 씨가 잉태돼 죄를 해산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죄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변신을 합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고 사망으로 몰아갑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성경에 보면 탐욕으로 인해 망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롯과 그 시대의 사람들, 노아시대의 사람들, 바벨론 탑을 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야곱, 발람, 아간, 엘리의 아들들, 사무엘의 아들들, 아합, 사울 등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사실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과연 탐욕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장된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척 하면서, 교회를 위하는 척 하면서 탐욕을 가집니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뿌리고 간 것입니다. 신약에는 부자 청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 모두 탐욕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중에는 패가망신하거나 즉사하거나 심판을 당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 탐욕으로 망할 뻔 하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탐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대한 두 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패가망신하거나 자살하거나 살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도 될 수 있습니다.
교활한 사탄의 공격
탐욕의 씨를 뿌리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데, 바로 사탄입니다. 탐욕은 분명히 본능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욕심을 본능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자꾸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무서운 탐욕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리게 한 것이 탐욕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본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놓으니까 사탄이 가장 먼저 와서 탐욕이라는 방법으로 인간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렸던 사탄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나타났을 때 다시 공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 가지로 유혹합니다.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를 공격한 방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현대과학이나 철학 등으로 그럴듯하게 위장을 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결국은 욕망을 갖게 하고, 죄를 낳게 하고, 죄가 자라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사탄이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찾아갑니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유혹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여자한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에도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마귀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모든 실과를 다 먹지 말라고 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의심하면 탐욕이 들어옵니다. 말씀을 의심하면 둑이 무너지듯 죄악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편집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상입니다. 매우 이성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오늘날 신학자 대부분이 이 이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고 말합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탄
사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의심의 단계가 지나가면 마귀는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게 합니다. 첫 번째로 의심을 주고, 두 번째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틀렸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하게 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거짓환상을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면서 거짓환상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그 말씀이 그럴 듯하게 들리고 선악과를 보니까 아주 먹고 싶고 탐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가 첫째 먹기에 좋고 두 번째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세 번째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탐욕의 씨를 뿌린 사탄이 몇 단계에 걸쳐서 우리를 속여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또한 죄는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들어오면 무섭게 퍼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시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7절을 읽겠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인간은 탐욕의 인간, 정욕의 인간, 죄를 짓는 인간, 우상 숭배하는 인간, 어두움의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질투와 살인과 다툼과 사기와 악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수군거리기를 좋아하고,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악한 일을 궁리해 내고, 부모를 거역하고, 어리석고, 신의가 없고, 인정도 없고, 무자비합니다(롬 1:29~31). 여러분, 어떤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악한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첫째 아이는 어린 동생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갓 태어난 동생의 눈을 후벼 파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쳤겠어요? 인간 안에 일어나는 죄악들은 누가 가르친 게 아닙니다.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악의 씨가 잉태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성향으로 그렇게 흐르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갈라디아서 5장 19~20절을 읽겠습니다. “육체의 일들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죄를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습니다. 나도 모르게 악한 생각을 하게 되고,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안에 탐욕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기도도 하고 회개를 하면서도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고, 다른 사람을 이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탐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탐욕이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단순히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하면 탐욕으로 인해 죄에서 영원히 못 벗어납니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십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여러분을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탐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나서 사탄이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해서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여러분,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주 안에서 그리고 주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에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에 영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6:10~12).
‘탐욕’의 반대, ‘나눔’
저는 이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마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영적 전쟁을 대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십계명은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열 가지 방법입니다. 도덕적인 계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마귀를 이기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십계명 지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의 능력, 사탄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를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십자가만 붙들면 안 됩니다. 동시에 부활의 능력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말한 제자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에서 멈칫합니다. 포기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라고 만날 찬양하지만 그 뒤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 성취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처형을 당하려면 그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는 십자가가 있고, 여러분 각자가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게 가정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는 것, 힘들어하는 것, 어려워하는 것을 져야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해야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로 오면 모두 도망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의 반대는 나눔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면 탐욕이 없어집니다. 미움의 반대는 사랑이듯이 내 안에 찾아온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다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은사, 내 돈, 내 명예를 모두 남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그러면 탐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설교를 들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혀주시고 영적전쟁임을 선포하게 하시고
사탄의 교묘한 계획을 무너뜨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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