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한 낯선 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척박한 땅, 변변한 나무도 없는 황무지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유숙할 곳을 찾았으나 그런 곳에 민가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어두움 속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로, 홀로 양을 치며 살아가는 50대의 중년 남자였습니다.
그는 장 지오노를 집으로 안내하고 따뜻한 스프를 끓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루에서 뭔가를 꺼내 식탁에 쏟아놓고는 실한 것과 상한 것을 골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도토리였습니다.
정성스럽게 알찬 도토리 100개를 골라낸 다음, 다시 자루에 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을 차려준 후, 아무 말 없이 그 도토리 자루를 들고 산등성이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스럽게 그 도토리를 한 알 한 알 심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부피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1차 대전이 일어났고, 온 유럽에는 무서운 파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소용돌이가 몰아쳤습니다.
젊은 장 지오노도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장 지오노는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부피에가 거기에 여전히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여전히 하루에 100개의 도토리를 심었고,
어느덧 그 주위는 푸른 숲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매년 장 지오노는 그곳을 찾았고 말없이 나무를 심는 부피에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35년, 한 산림 감독관이 처음 보는 울창한 숲을 발견하고 당국에 보고하였습니다.
의회는 그 숲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 산림전문가들, 고위 관료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숲은 자연이 준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짧은 책의 내용으로,
장 지오노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후,
20년 동안에 걸쳐 다듬고 또 다듬어 완성하였습니다.
원래 엘제아르 부피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뒤이어 아내마저 죽었습니다.
그 후, 부피에는 사람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는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슬픔에서 깨어난 그는 어느 날, 나무가 없어서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으므로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자, 황무지는 점차 울창한 숲으로 변화됐습니다.
말라붙었던 시내에는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엘제아르가 해 온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숲이 스스로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엘제아르 부피에는 89세를 일기로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 지오노의 고향 남 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코의 입구에는 이렇게 쓴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은 프로방스의 위대한 작가 지오노가 태어나고 살고 잠든 곳이니,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정말 위대한 사람은 홀로 말없이 나무만 심었던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일에, 생명의 일에 전념했던 그 앞에서 우리는 조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입을 다물고 조용해져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나무를 심기 위해 이 땅에 왔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하셨던, 그 일은 모두 모두 십자가에 달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죽음은 준비하지 않고 살길만 찾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인간은 살 생각만 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죽을 생각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러 오셨는가?
죽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가 얼마 후에 벽에 부딪힙니다.
그 벽은 더 이상 내 자신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곳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죽지 않겠다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서 몇 마디만 해도 곧 그 벽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아도,
그럴 듯한 언변으로 수많은 말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은 그 벽 앞에서 돌아섭니다.
그리고 그는 그 벽에 갇혀 외롭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곧 잊혀집니다.
홀로 살았으나 엘제아르 부피에가 외롭지 않았던 이유, 살수록 행복이 더해졌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으나 여전히 그 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이유는
예수님은 죽으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이 아직도 살만한 이유,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쳤던 사람들이 죽었고,
여전히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인이 살고, 교인들이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죽어야 세상이 하나님께서 바라는 곳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는 죽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나를 내어줄 수 있고, 나를 내어줄 때,
가족들이 살고, 사람들이 살고, 그 때 진정으로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출처] 생명의 일에 전념한 사람 |작성자 다윗의 물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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