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전실일득(全失一得) 신앙
(욥1:1-11, 21-22)
◆본문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서론
-욥(히;이요브)-주인공-뜻; 박해받는 자
-저자-미상 -기록연대-BC10세기 지혜문학이 발달했던 솔로몬시대 추정
-배경;BC2000년경 창세기실재 인물(겔14:14,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아멘!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4:14)’
*주제-고난도 하나님의 섭리다.
욥기는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겔14:14, 약5:11)인물이 의롭고 선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실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을 갑자기 당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의인도 극심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이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롭고 지혜로운 섭리에 대하여 인간은 절대적 순종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욥의 신앙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 도전을 받도록 하고자 합니다.
◆본론
그러면 욥은 어떤 신앙의 소유한 사람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증하신 사람입니다.(1절)
먼저 욥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서는 욥에 대한 소개를 하나님의 평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이런 칭찬은 사람에게서도 받기 힘든 평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서에서 1:8과 2:3에서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성경에서 ‘온전하다’라는 단어는 다섯 가지 의미로 구분되어 사용합니다.
로마서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에서 ①‘온전’은 ‘perfect will’ 즉 ‘완전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야고보서1:2-4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②온전히(pure-순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③온전히(finish-끝까지)이루라 이는 너희로 ④온전(mature-성숙함)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욥에게 수식된 ‘온전한 사람’은 ⑤‘blameless-흠잡을데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욥은 이런 극찬을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욥기는 고난을 겪은 한 성도가 어떻게 고난 앞에서 신앙을 지키는가가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욥의 고난’ 이전에 ‘욥의 태도’에 주목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늘 강조하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가져야할 두 가지 필수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저와 우리의 문제는 ‘거룩한 삶’의 결여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날 우리 민족교회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거룩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룩한 삶’은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선 저도 종종 스스로 깜짝 깜짝 놀랍니다. 이게 성도의 거룩한 삶인가? 이게 목사의 삶인가?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삶과 태도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유지했을까요?
5절 말씀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욥이 성결함을 유지한 방법입니다. 구약은 제사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영적 육체적 성결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욥은 자식들이 찬치를 한 후에도 혹시 범죄하지 않았을까하여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는 어떻게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딤전4:5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매일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제가 매일 단톡방에 말씀 묵상을 올리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이며, 묵상할 이유이고, 기도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지체들이 그것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구 교회가 왜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사라졌고,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거룩성의 상실’입니다.
욥은 본인과 자녀들의 정결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영성과 거룩성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 신앙의 소유한 사람일까요?
▶둘째, 사탄의 공격을 무력화 시킨 사람입니다.(2절)
먼저 6절을 읽겠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이것을 천상회의 장면을 풍유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네 하엘로힘’으로 하늘에 있는 영들에 대한 명칭으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본래 인간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자 만드신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수종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사들 가운데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가 ‘사단’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한편 여기서 ‘아들’이란 표현은 ‘천사들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4-15)”
여러분! 우리도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편,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온 세상을 꾀는 자’(계12:9)입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원래 타락 후 천상에서 쫒겨난 사단(사14:12-20)‘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절에서 마치 사단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된 것은,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히브리 문학에서 하나의 풍유적 기법입니다. 즉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참소하고 미혹하는지 그 활동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도입된 것입니다.
다함께 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기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행적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 행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며, 동시에 ‘사단’의 하는 일이 ‘온 세상을 꾀는 자’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사단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없이 독단적으로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사단의 활동상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벧5:8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항상 깨어 경성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8-9절 사단이 참소가 이어집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이렇게 해서 욥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이후 욥이 당한 고난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지만 2차에 걸친 사단의 엄청난 공격에도 욥의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2장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통쾌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느혜미야서 아시지요? 바벨론(후에 페르시아)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 중 일부가 귀환하여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벽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온갖 시련을 격어야 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대표로하는 대적이 성벽중건을 철저히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대적들은 처음에는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
하지만 백성들은 굳건히 성벽 중건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협박까지 합니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 치려고 합니다.
느혜미야는 한손에는 무기를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사역했습니다.
철저한 방비는 저들이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방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회담을 명분으로 오노평지로 불러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속지 않습니다.
이어서 모함하는 봉하지 않는 편지를 배달합니다.
그도 통하지 않으니 돈으로 제사장을 매수해서 느혜미야를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사단의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동족간 형제간 내분을 일으켜 사역을 약하게 하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하나님의 종 느혜미야는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대적의 궤계도 능히 물리칩니다.
대적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벽은 52일 만에 다시 수축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느혜이먀서을 읽을 때마다 통쾌한 장면이 바로 느6:16입니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사단)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성벽이 재건되자 사단이 낙담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때문에 사단이 낙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을 공격했던 사단튼 오늘도 내일도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공격하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궤계가 무너지고 사단 스스로 낙단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 신앙의 소유한 사람일까요?
▶셋째, 전실일득(全失 1得)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2절)
어떤 랍비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외출한 사이에 두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두 아들의 시체를 방안으로 옮겼습니다. 한참 후 랍비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기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그가 찾아와서는 그것들을 돌려달라는데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는 별 생각 없이 쉽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주인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그제서야 아내는 랍비를 데리고 두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으셨던 귀중한 보석들을 찾아 가셨답니다?
이런 비슷한 고백이 본문 21-22에도 나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순식간에 욥의 가옥과 가축과 재산 그리고 심지어 모든 자식까지 잃었습니다.
그 때 욥이 한 이 고백!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이말 한마디가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힙니다.
이 욥의 신앙고백을 <전실 1득(全失 1得)>신앙이라고 합니다.
<전실 1득(全失 1得)>신앙!
즉 모든 것을 잃더라고 오직 한 가지 <믿음>만은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망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실 일득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욥만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신앙고백을 했던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칙령‘을 알고도 평소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던 다니엘도 ’전실일득‘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여기서 당연히 사도 바울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외에도 <전실 일득>신앙의 소유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신앙도 그렇고
130년 전 조선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선교사들이 그렇고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오지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의 이런 신앙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광야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분들이며
아주 작은 일에도 목숨 바쳐 충성했던 하나님이 종들이 모두 전실일득 신앙인 들입니다.
대학시절 특별히 애창했던 찬양 두곡이 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이란 찬송과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돌이켜 보면 이 두 찬송 모두 <전실 1득(全失 1得)의 신앙>으로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고난 없이 영광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취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는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욥의 신앙에 대해 도전 받았습니다.
욥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증하신 신앙입니다.
욥의 신앙은 욥을 공격했던 사단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신앙입니다.
그리고 욥은 <전실 1득(全失 1得)>신앙입니다.
<전실 1득(全失 1得)>신앙!
그것은 모든 것을 잃더라고 오직 한 가지 <믿음>만은 잃지 않겠다는 신앙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신앙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겠다(빌1:20)’
저는 이런 사람을 ‘배수진을 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참 많이 어렵습니다.
우리 지체들도 예외가 아닌 줄 압니다.
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이 바로
‘전신일득’의 신앙! ‘배수진을 친 신앙’입니다.
전실일득의 신앙으로 이 한 주간도 광야에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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