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다윗의 기도 (삼하 7:18~29)

새벽지기1 2019. 4. 10. 07:50

하나님과 동행했던 분들의 기도를 말씀으로 기록해 주신 것은 이 기도들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때로 우리 기도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요청만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하는 기도만이 기도의 전부라고 한다면 균형이 깨어진 기도, 하나님과 교제의 축복을 상실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경배(Adoration), 둘째, 고백(Confession), 셋째, 감사(Thanksgiving), 넷째. 간구(Supplication)입니다. 하나님 되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높여드리는 경배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한없이 보잘 것 없음과 연약함, 부족함, 죄악, 허물을 고백하는 자백,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 우리의 구체적 필요와 사회와 주변의 기도제목들을 올려드리는 간구가 어우러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다윗의 기도는 기도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 속에는 찬양과 경배와 고백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간구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 
 
“그러자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 여호와 앞에 앉아 기도했습니다”(18절). 
다윗이 기도하기 위해 택한 장소는 성막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물며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오래 머물며 기도한 것은 큰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헤아려보기 위하여 오랜 시간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큰 문제 앞에서 길어집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평탄할 때는 기도가 짧습니다. 큰 문제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위기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위기도 없었습니다. 가장 풍요롭고, 평안했던 시기가 사무엘하 7장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헤아려 보면서 오랜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깊이 되새기고, 헤아리고, 묵상하며 다윗처럼 오래 앉아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제가 누구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셨습니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이것도 부족하게 여기시고 주의 종의 집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주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입니까? 주 여호와께서 주의 종을 아시니 이 다윗이 주께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주의 뜻에 따라 주의 말씀으로 이 모든 위대한 일을 하셨고 주의 종에게 알려 주셨습니다(18b~21절).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에서 왕이 된 신분의 변화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노력으로 성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울의 공격을 피해 광야를 도망 다녔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놀라운 신분의 변화로 인하여 다윗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감사하고 있는  내용이 그것뿐이라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들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감사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다윗의 신분의 변화로 인한 감사는 10중에서 1도 되지 않는 지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더 많은 감사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한 감사입니다. 또 다른 은혜로 인한 감사가 다윗의 기도 가운데 풍성하게 넘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세 개의 수사의문문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제가 누구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 자리까지 오르게 하셨습니까?”(18절), “이것이 주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입니까?”(19절), “주 여호와께서 주의 종을 아시니 이 다윗이 주께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20절) 
이 질문들은 의문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하신 것부터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에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주목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할 때  그 위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낮아지심, 겸손하심에 다윗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여드려도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표현할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정체성과 백향목으로 된 집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주 같은 분이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22절). 
‘주 같은 분이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부이며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익숙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삶 속에서 하나님만이 전부인 것처럼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정시대의 왕은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권세, 물질, 지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높여드리는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도 일평생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주 같은 분은 없고 주님만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의 감사기도가 풍성해진 두 가지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는 ‘주 여호와여’라는 호칭이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라는 단어에서 ‘주’라는 글자는 쓴 것은 자신이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의식 이전에 하나님께서 왕의 신분을 주신 것이지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종 된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감사기도를 만들었던 또 다른 핵심 단어는 ‘집’입니다. 이 기도문을 보면 ‘주의 종의 집’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자신의 집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집’은 부동산이 아닙니다. 기도의 주제가 집입니다. 사무엘하 7장 1~17절까지 일어난 사건이 집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사무엘하 7장의 역사적인 시점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권이 가장 평안했을 때입니다. 경제적으로 부강했고, 정치적으로도 평안했습니다. 다윗왕국이 정점을 이루었던 시대입니다. 다윗이 거주했던 집이 백향목으로 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던 곳은 성막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백향목으로 된 집에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막에 있다면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윗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막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나단 선지자도 그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광야를 지나는 동안 백향목으로 된 집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임재는  집의 크기, 규모, 재료와 상관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다고? 짓지 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순수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고 하는 순간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를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표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왕조)을 짓겠다”
“내가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던 때와는 같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또 너를 네 모든 원수들로부터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직접 너를 위해 왕조를 세울 것을 선포한다. 네 날들이 끝나고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자손을 일으켜 네 뒤를 잇게 하고 내가 그의 나라를 든든히 세울 것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집을 세울 것이고 나는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줄 것이다”(11~13절).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됐다고 하시며 “내가 너를 위해 집(왕조)을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은 보이는 집이 아니라 왕조입니다. 히브리어는 단어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뜻이 함께 쓰이는데 집과 왕조를 함께 씁니다. 12절에 나오는 왕조는 솔로몬을 통한 왕조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줄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만은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벤’은 ‘아들’이라는 뜻인데, 1대 아들도 벤이고, 2대 아들도 벤이고, 100대 아들도 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몇 대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네 몸에서 나올 네 자손”은 솔로몬도 되고, 솔로몬의 아들도 되고, 그 후의 아들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도 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중심적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에만 “아멘”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나타나는 말씀에 감동하고 무릎을 치면서 성경은 인간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때에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왕조를 세우시고,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계시를 받고 기도합니다. 이 계시가 임했을 때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것에 감동해서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전율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주 하나님이시여, 그러니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해 약속하신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영원히 높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세워지게 해 주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종에게 드러내며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 하고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이 용기를 내어 이런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말씀은 진실하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이런 좋은 것으로 약속하셨으니 주의 종의 집에 기꺼이 복을 주셔서 그것이 주 앞에서 영원히 지속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의 집이 주께서 내리시는 복으로 영원히 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25~29절). 

‘영원’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보좌를 영원히 세워 줄 것이다”라고 딱 한 번 말씀하셨는데 다윗은 그 계시를 받고 영원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그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드려지는 기도가 진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본성을 통해서 기도할 수 있고, 위기일 때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이 주어질 때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고, 올바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임했을 때 다윗은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하고 말씀하셨으니 주의 종이 용기를 내어 이런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용기를 얻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할 수 있게 한 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받은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메대 사람인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왕이 돼 바벨론을 다스린 첫해였습니다. 곧 그가 다스린 지 1년 되던 해에 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보고 여호와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연수를 정해 말씀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70년 만에 돌이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단 9:1~2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과 계시를 받은 것을 메모하고 기록한 서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거기 보니까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다니엘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이 임할 때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다윗은 기도 후반부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담겨있는 한 단어를 붙잡습니다. ‘영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윗의 왕조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쓴 단어가 아닙니다. 실제 영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원은 실제적인 영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주신 분이 영원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역사의 시작자요, 심판자가 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영원한 시각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왕이 됐다는 것에 감사하고,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감사를 뛰어넘어서 자신의 후손을 통해, 다윗의 집을 통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이고, 영원히 복된 나라이며, 영원히 축복된 나라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영원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일을 겪게 되고, 이 세상은 더 절망적이 될 것이며, 전쟁과 기근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진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종말의 예언대로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안전은 바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고,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기도, 미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영원의 시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가졌던 감사, 경배, 그리고 고백과 간구가 우리의 기도 속에도 풍성하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