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여호수아의 기도 (수 10:8~14)

새벽지기1 2019. 3. 18. 07:10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중에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ow) 대위가  있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에 온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다녔고, 어린 시절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미 해군에 입대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했습니다. 1947년 전역한 이후 다시 한국에 와서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해양경비대사관학교 교관으로 일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교관으로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졸업을 8개월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내려놓고 파병을 자원했습니다. 미 해군에 재입대를 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왜 파병을 자원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내가 어떻게 공부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이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에 선교사로 가려는 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한국어에 능통했고, 한국 지리에도 밝았기 때문에 해군 정보장교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역사에는 맥아더 장군만 알려졌지만 윌리엄 해밀턴 쇼 같은 지혜롭고 한국 정보를 잘 아는 참모가 없었다면 그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했다가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매복중인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8세였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선교사였던 부모님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묻혀 있습니다. 2010년 은평감리교회의 후원으로 은평구 녹번동 평화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낸 것뿐인데 한국을 조국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자신만의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중보기도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기적,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국가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같은 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아내는 두 자녀와 함께 서울에 와서 이화여대 교수로, 그의 아들은 서울법대 교수로 섬겼습니다. 손자는 경기도 오산에서 공군 장교로 대를 이어 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한국 선교사로 헌신했고, 어린 시절 한국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에게 한국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공동체 의식을 부여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릴 만큼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헌신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헌신을 받으시고 사용하셔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브온 족속과 여호수아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 역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구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부 지역을 모두 점령했을 때 기브온 족속이 여호수아를 찾아와 속였습니다. 먼 지역에서 온 것처럼 속이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속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조약이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중부 지역을 모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안 남부 지역에 있던 여러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대비했습니다. 동맹을 맺은 남부 지역 국가들이 자신들을 배반한 기브온 족속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기브온 족속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의 종들을 그냥 버려두지 마시고 급히 우리에게 올라와 구원하고 도와주십시오!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이 우리를 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6절).
기브온 족속의 요청을 받은 여호수아가 즉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족속을 구하러 가는 여호수아의 발걸음이 불필요해보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속이고 조약을 맺은 기브온 족속이 남부 지역 동맹국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고, ‘어차피 가나안 족속이고 굳이 참여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대단한 결정이요,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기브온과 길갈은 약 38km가 떨어져 있었고, 오르막길에 1,200m나 되는 산악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험한 길을 가서 남부 지역 연합군과 싸운다는 것이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서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결단을 했습니다. 
 
 
최소화 VS 최대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너를 당해 낼 자가 없을 것이다’”(8절). 
여호수아가 마음에 품은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먼저 명령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민족과 조약을 맺은 기브온 족속을 구하러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헌신을 보면서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를 묻게 되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조약을 맺은 기브온 족속을 이스라엘 족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누군가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5리를 더 가야합니까? 어쩌면 불필요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시 겉옷은 이불과 같은 역할을 했고, 속옷은 우리가 입는 겉옷입니다. 어쨌든 왜 이런 불필요한 일을 합니까? 그것은 어떤 관계든지 자신의 의무를 최소화하는 사람이 있고, 최대화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라고 해서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이 세상 부모와 자녀 모두가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형식적이고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일이 주어지면 최소한의 일만 하려는 사람이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까지 최대한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할 때 최소한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말씀을 최대한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기브온 족속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던 여호수아의 헌신이 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크게 생각하고 묵상하는데 어떠한 결정과 결단과 발걸음에서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전무후무한 기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려 기브온에서 그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셨고 벧호론으로 올라가는 길을 쫓아 아세가와 막게다에 이르러 그들을 치셨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 큰 혼란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큰 혼란과 두려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큰 평화와 담대함과 용기가 임합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는 큰 용기와 담대함이 임했고, 대적들에게는 큰 두려움과 혼란이 임했습니다.  
매튜 핸리 목사님은 이들에게 임한 두려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늘이 자신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적들은 얼마나 엄청난 공포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겠는가? 누가 하늘의 권능과 다툴 수 있으며 또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겠는가? 또 누가 하늘의 권능에 대항하여 담당을 치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대적자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개입은 혼란 속에 있는 그들에게 큰 우박을 내리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쳐 벧호론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거기서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리셔서 그들이 죽었습니다.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이 이스라엘 군사들의 칼에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습니다”(11절). 
하나님이 직접 전쟁에서 싸우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전쟁의 날에 우박을 준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눈의 창고에 들어가 본 적이 있으며 우박의 창고를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은 내가 고난의 때를 위해, 전쟁과 전투의 날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욥 38:22~23).
하나님의 개입 덕분에 이스라엘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밤새 행군했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5개 남부 지역 연합군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대적들이 있었고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호수아가 전무후무한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신 그날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오 해야, 기브온에 그대로 멈춰 있어라. 오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그대로 멈춰 있어라’”(12절).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해를 향해, 달을 향해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께 해와 달이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낮의 길이를 길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출애굽 역사 이후 놀라운 기적들이 있었지만 모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할 때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에 모세가 순종했고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도가 특별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능력을 믿는 담대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담대하게 요청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뒤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물이 우리의 통치 속에 있으려면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그러자 백성이 적들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해는 멈춰 있었고 달도 멈춰 섰습니다. 야살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해가 중천에 서서 하루 종일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신 날은 전무후무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편에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13~14절).
해가 중천에 서서 하루 종일 지지 않을 것을 두고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시적인 표현일 것이다”, “잠시 빛을 가렸을 뿐이다”, “빛의 굴절로 인해서 햇빛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등 여러 가지 이성적인 해석을 해 보지만 “여호와께서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신 날은 전무후무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믿는 것이 더 쉽습니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면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움직이시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해와 달을 하나님으로 믿고 불순종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쉽습니까? 해와 달을 움직이는 것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불순종하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해와 달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창조주의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해와 달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잊어버리고 해와 달을 신으로 섬기는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한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역사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해와 달은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가 이름 중에 ‘~탄’으로 끝나는 이름들이 많습니다. 이 국가들은 조상 대대로 달이나 태양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국기에 달과 태양이 같이 있는 나라도 있고, 둘 중 하나가 꼭 있습니다. 숭배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해와 달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해와 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수만 번 기도응답을 받았던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번은 중요한 집회가 있어서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배가 출발을 하지 못했습니다. 기상청은 이 안개가 언제 사라질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조지 뮬러가 선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약속에 늦어본 적이 없고, 취소를 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안개는 걷힐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마친 즉시 안개가 걷혔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때마침 그렇게 된 것이겠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연을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위대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순간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중국개척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시도되는 모든 위대한 일에는 언제나 세 단계가 존재한다. 불가능함, 어려움, 성취이다.”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불가능해 보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어렵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이루어집니다.
필립 브룩스라는 청교도는 “쉬운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보다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이런 믿음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 역사가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