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아론의 기도( 민수기 6장 22~27절)

새벽지기1 2019. 3. 11. 07:19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령을 따라 행하기만 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뒤죽박죽된 것 같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아이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한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새벽을 가져왔던 사무엘이라는 축복된 지도자를 예비하셨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 생활을 했던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기근의 때에 생존하고 번성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기만 하면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축복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축복은 고통이 없고 더 쉬운 삶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은 더 안락한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신 삶은 더욱 거룩하고 정결한 삶입니다. 하나님께 더욱 쓰임 받는 삶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조직을 정비하고 광야를 통과할 준비를 하던 바로 그때 아론에게 축복을 명령하셨습니다. 정확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하기 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제 광야를 만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광야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너희를 향한 나의 계획은 광야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여 축복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쓰신 <광야의 삶은 축복이다>라는 책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광야는 축복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요 버려진 땅이지만 광야는 축복의 땅입니다. 광야에서 발견하는 축복이란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길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여행은 축복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해 말하여라”(22~23절). 
그 당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미완료 시제를 통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령에 근거해서 제사장들이 모임을 마칠 때마다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회당에서 랍비가 이 기도에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칩니다. 경건한 유대인 가정은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저녁식사 전에 자녀들에게 아론의 축복을 읽어준다고 합니다. 개신교 종교개혁 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기도 외에 아론의 기도로 예배를 마쳤던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그 내용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제사장이 선포, 전달, 간구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축복 기도의 내용은 24~26절까지 나오는데 매우 아름답고 운율이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복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비노라.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시고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비노라.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너를 향해 드시고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비노라”(24~26절).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15개 단어가 나옵니다. 15개 단어가 세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열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여호와’입니다. 한글성경에서도 “여호와께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동사가 먼저 나오니까 항상 여호와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도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 번 등장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15개 단어에서 세 번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빼면 단어 열두 개가 됩니다. ‘12’라는 숫자를 들으면 우리는 당연히 열두 지파를 생각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또 각 구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서 접속사 ‘그리고’가 들어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그리고’의 앞부분은 일반적인 내용이고 뒷부분은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보면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것이 구체적인 복의 내용입니다. 24절에 적용해 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세 구절이 갈수록 단어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24절은 세 단어, 25절은 다섯 단어, 26절은 일곱 단어입니다. 단어의 숫자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크레셴도’처럼 점점 하나님의 축복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또한 점점 풍성해지고 더 적극적으로 나타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주신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신다’고, 26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너를 향해 드신다’고 표현했습니다. 단어의 숫자도 의미가 있거니와 그 내용도 점점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보호하심의 복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비노라”(24절). 
첫 번째 복은 ‘보호하심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보호하심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목마를 수도 있고, 배고플 수도 있고, 어떤 위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복은 보호하심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예수 믿는 농부의 밭에서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유치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밭에서만 열매를 맺고, 예수 믿는 사람의 기업이 잘 되면 모두가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치사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만일 지구가 태양과 조금만 더 가깝거나 멀어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만 더 움직여도 지구는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고 느끼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가 전우주적으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될까?’ 싶을 정도 끔직한 일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반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기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순간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함께 하십니다. 
 
 
은혜 베푸심의 복 
 
두 번째 복은 ‘은혜 베푸심의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시고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비노라”(25절). 
은혜 베푸심의 복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확장된 하나님의 복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얼굴’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얼굴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임재하심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빛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이다. 너희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 
따라서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두 번째 복은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을 복되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차원의 복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됨을 복으로 여기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복인데 모든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과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어 주셨기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동의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어 주셨기 때입니다. 말씀을 읽고, 우리가 어떤 강의나 설교를 통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했구나,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나에게 비추어 주셨구나”고 고백하십시오. 날마다 큐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오늘도 나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과 이 나라와 민족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강 주심의 복 
 
세 번째 복은 ‘평강 주심의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너를 향해 드시고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비노라”(26절).
평강 주심의 복은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를 향해 드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빛을 비춰주시는데 세 번째 복은 하나님이 얼굴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든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얼굴을 숙인다’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얼굴, 고개를 숙인다’는 표현을 찾아보면 그것은 ‘화가 나다. 분노하다. 불쾌하다’는 의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기사에서 ‘가인이 고개를 떨구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화가 났을 때, 분노했을 때 고개를 숙인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문화와 정반대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화가 나면 고개를 쳐듭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하나님께서 고개를 드신다는 것은 화가 나신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히브리 문화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이 화가 난 것이고, 고개를 들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문화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가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는데 선생님이 저희 아이들을 좋지 않게 봤습니다. 왜 그런지 봤더니 우리 문화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야단치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간혹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뭘 잘했다고 쳐다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으로 상대방을 쳐다봐야 하는데 저희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니까 선생님이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복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복으로 확장되고, 여기서 평강을 주시는 복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대적이나 갈등이 없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샬롬이 최고의 복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에도 1~3절 이내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가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을 먼저 기원하며 편지를 시작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이 있고, 틀림없이 아론의 축복 기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샬롬, 하나님의 평강의 복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춤으로 하나님을 아는 복의 경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평강, 샬롬을 누리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샬롬은 정말 축복된 상태입니다. 세상의 환경을 뛰어넘는 평강입니다. 고난을 뛰어넘는 평강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강입니다. 샬롬, 하나님의 평강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와 이 나라와 민족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우리가 알지 못할 때, 때로 두려움 가운데 임하는 것이지만, 샬롬은 하나님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지는 복이지만, 하나님의 샬롬, 평강은 하나님을 아는 은혜의 복을 누린 자만이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이들도 보호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춤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병듭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의학이 발전해서 수명이 연장될 것입니다. 몇 백 년 연장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줬던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을 대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그분이 평강의 복을 누렸는지, 누리지 못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 속에서 우리에게 예비 된 세상을 맞이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