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 9~18)

새벽지기1 2019. 3. 26. 07:3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 중 하나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대답이 가능하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개인적인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 한 나라의 고통을 품는 기도로 변화시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질 때는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한 역사의 고통과 상처까지 치유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어둡고 타락했던 시대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 역사의 어둠을 거둬내고 역사의 새벽을 가져온 것이 바로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가 기도한 이유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개인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고통, 역사의 고통을 치유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주셨던 고통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에게 주어진 고통은 역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나의 고통에는 한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개인이 고통 속에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한 시대, 한 역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한나의 기도로 사무엘상 1장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고통 속에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시고, 그 기도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고통
 
한나의 고통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입니다. 한나가 이 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했습니다.
한나가 남편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은 남편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엘가나의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만 채워지는 빈자리였습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경건한 가문의 후예였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경건하다는 것과 두 아내가 있었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문화의 낮은 윤리적 수준에서는 자녀 생산을 위해 두 번째 아내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아내 브닌나의 이름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뜻입니다. 실제 엘가나는 브닌나를 통해 얻은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한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엘가나는 제사드리는 날이 올 때마다 자기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아들딸들에게 제물로 드릴 고기를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배를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한나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삼상 1:4~5). 
한나는 남편에게 두 배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남편에게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한나에게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겨난 고통은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를 통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쓴 ‘도르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축복의 잔을 가지고 인간에게 축복을 부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다 부어주시다가 다 부어질 무렵 중단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축복을 다 부어주면 인간들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취해 살까봐 안식이 없는 나머지를 남겨두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안식 없음을 그 나머지로 남겨두시고, 그것을 도르래가 되게 하셔서 인간을 하나님의 가슴으로 전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속에 있었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그 고통은 도르래가 되어서 그 고통을 하나님께 전달하게 했던 것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하나님께 더 빨리 가까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당시 문화에서 여인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였습니다. 한나는 그 고통이라는 도르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통을 오직 하나님께 쏟아내다   
 
둘째, 한나는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의 괴롭힘에 맞서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그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토해냈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자녀를 주시지 않았으므로 브닌나는 계속해서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계속됐습니다.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한나는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6~7절).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힌 것은 계획적이고 의도적이었습니다. 브닌나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한나를 괴롭히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에게 대항하지 않았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와 매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아브라함의 가정과 비교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주도해서 하갈이라는 여종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교만해져서 아이를 낳은 후에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라는 자신을 무시하는 하갈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먼저 남편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은 모두 당신 책임입니다. 내가 내 종을 당신 품에 두었건만 이제 그녀가 임신했다고 나를 멸시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 사이에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창 16:5).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 사이에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은 점잖게 번역했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당신이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해보자”는 뜻입니다. 부부가 강렬하게 싸울 때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갈에게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사라가 어느 정도 괴롭혔냐면 하갈이 도망갈 정도였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이긴 것입니다. 한나는 사라와 정반대였습니다. 한나는 브닌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나’라는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사랑스러운’, ‘매력적인’입니다. 한나는 이름에 합당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한나는 브닌나와 다투지 않고 하나님과 다퉜습니다. 브닌나에 받은 괴로움을 되갚아주지 않고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사라처럼 남편에게 괴로움을 쏟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한나에게 남편 엘가나는 ‘한나, 왜 그렇게 울고 있소? 왜 먹지 않고 있소? 왜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소?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하고 말했습니다”(8절).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소?”라는 말을 보면 엘가나는 한나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나는 남편에게 쏟아내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괴로움을 오직 하나님께만 쏟아냈습니다.  
“한나가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슬픔이 가득한 여자입니다. 저는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제 심정을 쏟아 낸 것입니다’”(15절). 
‘심정을 쏟아 냈다’는 말의 원문은 ‘영혼을 쏟아 냈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에 담아둘 수 없고, 담아둬서도 안 되는 고통과 상처를 하나님께 쏟아냈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토하게 됩니다. 쏟아내게 됩니다. 우리 영혼에 죄가 들어오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미움, 분노, 상처, 괴로움은 우리 영혼 속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영혼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육체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영혼의 통곡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 이면에 있었던 비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괴로움을 토해낸 것이 한나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고통을 쏟아내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에 대하여 욥이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고통과 괴로움을 쏟아내며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통에 대한 토로, 고통에 대한 원망, 한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서원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울고 또 울면서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하면서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여, 만약 주께서 주의 종의 비참함을 굽어보시어 저를 기억하시고 주의 종을 잊지 않고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제가 그 평생을 여호와께 바치고 결코 그 머리에 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0~11절). 
한나가 하나님께 쏟아내는 영혼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기도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면 아들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들이 목표였고 하나님이 도구였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의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아셨기에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실제 한나는 당시 제사장 엘리의 영적 무지에 분노하지 않고, 엘리를 통해 확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믿었습니다. 
 
 
영적 분별력 잃어버린 제사장 ‘엘리’ 
 
사사시대의 깊은 암흑기의 절정은 엘리라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엘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 9절에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성전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자’는 다른 곳에서 왕좌, 보좌 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의자가 아니라 어떤 지도자의 위치, 신분, 직무를 가리킵니다. 제사장이 직무를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구약 율법을 보면 제사장이 앉아서 직무를 행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직무를 행할 때 항상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앉아 있었습니다. 엘리는 영적 운동력과 영향력이 없고, 정체된 상태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장은 고통 속에서 기도하는 한나라는 여인과 하나님께로부터 직무를 받았지만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던 엘리라는 지도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 13절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투에 법궤를 보낸 후에 “엘리는 하나님의 궤로 인해 마음을 졸이며 길가 한쪽 의자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항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엘리의 무지가 나타납니다. 고통 속에서 울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신음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엘리는 ‘독한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분별력의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예의 있게 대했습니다. 엘리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 
 
“당신의 여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슬퍼 여기서 기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16절). 
한나는 사무엘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 헌신한 대로 엘리 제사장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한나는 엘리가 영적 영향력이 미약해도 하나님께서 엘리를 통해서 주시는 축복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엘리가 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한 것을 허락하실 것이오’”(17절). 
엘리가 축복했기 때문에 한나가 기도응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한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엘리가 중매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가 한나의 태도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한나는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제사장 엘리를 통해 전해들은 강복의 선언을 응답받은 줄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비록 제사장 엘리의 영적 영향력이 미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라면 하나님의 임재의 통로로 여기고,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주어진 강복의 선언을 믿은 것입니다.   
“한나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총받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한나는 가서 음식을 먹고 그 이후로 얼굴에 근심을 띠지 않았습니다”(18절). 
한나의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강복선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나 사역자를 당시 제사장과 동일시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의 원리로 말하자면 여전히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한나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과 술 취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사장 엘리와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할 수 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부정한 것을 덮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은 밝혀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기준, 내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못 받는 성도가 있고, 그 어떤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자기 기준입니다. 한나는 엘리의 강복선언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갔고, 자신을 괴롭히는 누군가와 다투지 않고 모든 괴로움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엘 리가 영적 영향력이 부족한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주신 강복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고통을 주셔서 역사의 새벽을 가져올 사무엘을 준비하게 하시고, 사무엘을 잘 양육할 수 있는 영적 어머니로 연단하셨습니다. 고통이 긴 이유는 그만큼 깊은 기도를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통이 강한 만큼 깊은 기도와 오랜 기도를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이 주신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일지라도 개인의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에는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그 고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면 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와 역사의 고통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