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사무엘의 기도 (삼상 3:1~14)

새벽지기1 2019. 4. 2. 07:00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어야 할 확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말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우리에게 들려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어떤 과학적 진리, 신학적 사변, 철학적 논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 각 개인에게 매우 인격적인 음성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 바울 등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시대에도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뜻 가운데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말씀에 나타나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에 음성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또한 분별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영역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말씀에 나타난 뜻을 분별해서 적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영역을 우리의 자유에 맡기시고,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지혜롭기를 기대하시지만 때로는 음성을 통해서 상황에 개입하시고 우리의 선택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지극히 주관적이고 왜곡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QT(Quite Time)’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혼의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기능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눈과 귀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아뢰고 구하는 것에만 몰두하면 기도의 본질과 축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상관없이 열심히 봉사하면 그 봉사와 헌신에 독이 들어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종교생활이 되거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위험한 삶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더욱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중요한 표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소년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했습니다. 네 번째 음성이 들릴 때 비로소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듣는 기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은 들을 귀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결정이든지 내 영혼에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음성으로 들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의 해석으로 판단하면서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을 가지고 투쟁하는 투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진화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글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아이가 아버지 집에 살고 있는가? 당신은 주님의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계속해서 주님과 이야기 하며 모든 것이 그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과 계속해서 대화하고, 듣고, 말씀드리고, 순종하며 또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가?”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은 없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사무엘은 여호와를 잘 알지 못했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7절).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힘들고,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거나 상처에 깊이 얽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친밀하게 동행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도록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또 다른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당신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증거는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으로 하여금 놀라울 정도로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순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의 모델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매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대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다 할지라도 죄와 상처에 머물러 있으면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옛 사람을 못 박고, 성령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섬기는 자리에서 듣는다 
 
하나님의 음성은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듣게 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후 엘가나는 라마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됐습니다”(삼상 2:11). 
사무엘상 2장 17~18절에서는 엘리의 두 아들과 비교하여 사무엘을 설명합니다. 
“이렇듯 엘리 아들들의 죄는 여호와 보시기에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년 사무엘은 고운 삼베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삼상 2:17~18). 
엘리의 두 아들은 부패하여 여호와의 제사를 업신여겼지만 소년 사무엘은 마땅히 입어야 할 섬기는 종의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엘리와 사무엘도 비교합니다. 
“어느 날 밤, 눈이 어두워져 잘 보지 못하는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고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누워 있었습니다”(2~3절). 
엘리와 사무엘이 누워있는 것을 비교합니다. 사람이 누워있는 것까지 성경에 기록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는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책임이 엘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가 책임져야 할 일을 사무엘이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누워있었습니다. 이처럼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고, 섬기려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조지 뮬러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천 명의 고아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섬기려는 마음조차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지 뮬러는 “제가 이 고아들을 섬겨야 합니까?”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섬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시편 말씀을 음성으로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에서 끌어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 입을 크게 벌려라. 그러면 내가 채워 주겠다”(시 81:10). 
조지 뮬러가 고아들을 섬기려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이 말씀을 음성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말씀을 신뢰하고 수많은 고아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외에도 수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리에 있을 때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자리에 한 번 서 보십시오. 그러면 예전에는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웃리치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장소만 옮겨도,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려는 그 섬김을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럴 때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 중심적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시지만 우리 영혼이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섬김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훈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과 혼동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음성과 혼동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음성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여러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외에 우리를 움직이는 네 가지인데 사탄의 음성, 세상의 음성, 옛 육신의 음성, 자기 자신의 음성입니다. 이 네 가지 음성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의 음성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십계명만 들이대도 사탄의 음성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사탄의 음성은 교묘하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도록 하고, 헌신하지 않도록 하고, 섬기지 않도록 합니다. 세상은 ‘너를 높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존심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음성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받은 교육이나 상처로부터 시작된 습관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끊을 수 없습니다. 본성을 따라 살아가면 아무런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음성이든지 듣게 되어 있습니다. 습관은 옛사람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성령을 의지하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구별하기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의 음성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복음화하려고 했습니다. 선한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선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음성은 소아시아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것도 선한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려는 선한 뜻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을 수 있습니다. 선한 뜻을 따라가다가 육신의 음성에 빠지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처럼 자기 안에 있는 선한 뜻일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선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하나님의 최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을 조언을 자동으로 인출해 주는 기계처럼 바꾸거나 성경을 마술사의 수정구슬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계속해서 대화하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면서 나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과 무엇이 다른 지를 깨닫고 순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는 시간 낭비(Wasting time with God)라는 책 제목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시간만큼 소비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삶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무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삶에서 듣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